ru24.pro
World News in Korean
Сентябрь
202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키스 해링의 벽화가 말하는 것

0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스위스 바젤에선 매년 6월이면 이 말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부터 54회째 이어오며 아트 페어의 기준이 된 아트 바젤 바젤 2024의 치열하고도 우아한 현장. 그곳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키스 해링의 숨은 삶을 살피고, ‘언리미티드’ 섹터를 수묵화로 물들인 김민정 작가와 ‘스테이트먼트’ 섹터에서 SF 작품을 현실로 이뤄내며 회자된 오묘초 작가를 만났다.

아트 바젤 바젤 2024의 ‘언리미티드’ 섹터에 키스 해링의 거대한 벽화가 등장했다. 사실 키스 해링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미지로 전 세계를 강타했지만, 늘 한편에선 예술가로서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아트 바젤 바젤 2024의 언리미티드 섹터에 글래드스톤 갤러리와 마르토스 갤러리가 출품한 키스 해링의 작품 ‘Untitled(FDR NY) #5-22’.

아트 바젤 바젤의 ‘언리미티드’ 섹터에는 17만2,000㎡의 대규모 공간에 40개국 단 76점의 작품만 자리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예술 공간의 프런트 로는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46m 벽화 ‘Untitled(FDR NY) #5-22’(1984)였다. 1984년 뉴욕시의 고속도로를 따라 놓인 패널에 그린 공공 벽화다. 매연과 비바람에 해졌지만 그 때문에 더 가치를 부여받은 듯 보였다. 글래드스톤 갤러리와 마르토스 갤러리는 40년이 넘어 이 작품을 언리미티드에 선보였다.

키스 해링이 고속도로에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은 어땠을까. 1972년 뉴욕 시장 존 린지(John Lindsay)는 그래피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물론 많은 시민이 그래피티를 싫어했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은근히 팬이 있었다. 한 해 전, <타임스>는 5개 자치구의 벽과 지하철에 자신의 태그 ‘TAKI 183’을 휘갈기고 다닌 10대 타키(Taki)에 감탄하는 기사를 실었고, 1974년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는 <에스콰이어>에 타키를 비롯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를 반 고흐와 비교하는 장문의 글을 썼다. 하지만 시장의 지시가 내려진 만큼 뉴욕 MTA(교통 공사)는 1970년대에만 수백만 달러를 들여 열차를 낙서 없이 유지하려 애를 썼다. 이는 오히려 사람들이 다시 그 위에 낙서하고 싶게 만들었다. 키스 해링을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개인전이 1982년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Tony Shafrazi Gallery)에서 열리기 전까지, 그래피티가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잠들어 있었다.

다만 당시에도 그래피티가 돈이 될 수 있다는 데는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여름의 끝자락에 주식 시장은 5년간 무서운 질주를 시작하며 그 뒤에 미술 시장을 끌고 달렸다. 갑자기 부를 거머쥐게 된 고객들은 코카인과 더러운 아파트, 그 도시의 쓸 만한 문화가 대부분 모여 있는 14번가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고작 1년 만에 이스트 빌리지에서만 20곳 이상의 새로운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브롱크스 남부에 있는 패션 모다(Fashion Moda)처럼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자기 작업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도 이미 있었지만, 그 금액에는 아니었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해링은 여러 지하철역에 수백 점의 아이, UFO, 개, 텔레비전 그림을 남겼고, 개인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샤프라지 갤러리의 벽을 이미지로 가득 채웠다. 전시를 연 지 며칠 되지 않아 25만 달러어치의 작품이 팔렸다. 그것은 그래피티이긴 하지만 집 안에 걸어둘 수 있는 특별한 작품이었다.

할렘의 핸드볼 코트, 애비뉴 D의 캔디 가게, 밀라노 두오모 광장의 피오루치(Fiorucci) 부티크, 파리의 뒤플렉스 지하철역(Dupleix Métro), 베를린 장벽, 심지어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해링의 목표는 세계 모든 곳에 자기 그림을 남기는 것인 듯했고, 언젠가는 성공할 듯 보였다. 그 과정에서 체포되고 법원에 소환되기도 했지만, 그가 유명해질수록 그런 일은 점차 드물어졌다. (1984년 또 다른 뉴욕 시장 에드 코크(Ed Koch)가 그의 공헌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샤프라지 갤러리 전시가 열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CBS 저녁 뉴스에 해링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어 약 1,400만 명이 시청했다. 이 뉴스는 지하철에 남긴 그의 그림을 조숙한 아이의 창작물로 소개했다. 가느다란 메탈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아이 같았고, 목소리는 더욱 그랬다. “제 그림은 굉장히 빨리 완성돼요. 그렇지만 세상이 그만큼 빠르게 움직이잖아요.” 해링이 말했다.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도로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해링은 정말 작업을 빨리했다. 하루에 수없이 많이 친숙한 것들을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 주변으로 구경꾼이 모여들었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서른한 살의 나이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팬덤은 점점 커져갔지만 그림 그리는 방식은 한결같았다. 빠른 속도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손길, 수도승처럼 집중하는 모습.

지난 3월 출간된 브래드 구치(Brad Gooch)의 전기 <광휘: 키스 해링의 삶과 유산(Radiant: The Life and Line of Keith Haring)>은 권모술수로 가득한 업계에서 더없이 순수했던 해링을 이야기한다.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도시에서 자란 그는 온 마음을 다한 진지한 열정으로 대중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는 4학년 때 밴드 몽키스(Monkees)에 푹 빠져 잡지 등에서 오린 데비 존스(Davy Jones) 사진으로 공책을 꽉 채웠다.

집착은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해링의 아버지는 그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닥터 수스(Dr. Seuss)>와 월트 디즈니를 보여주었다(둘 다 그의 그래피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후에 해링은 디즈니가 워홀,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이라고 말하곤 했다. 해링이 1982년에 그린 미키 마우스가 새빨간 자기 성기를 붙잡고 있는 그림은 자칫 만인에게 사랑받는 캐릭터에 대한 모독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디즈니에 대한 그의 마음을 떠올리면 이 애니메이션에 바치는 성물처럼 보인다. 해링이 뉴욕에 와서 처음 안 장소 중 하나인 크리스토퍼 거리를 “게이 디즈니랜드”라고 묘사한 것도 자기 기준에서는 최고의 찬사였다.

해링이 그래피티를 갤러리 예술로 격상시킬 또 다른 화가, 당시 10대였던 장 미셸 바스키아를 만난 것은 스무 살의 그가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School of Visual Arts)에 신입생으로 갓 들어간 1979년이었다. 같은 학기에 해링과 친구들은 57번가에 있는 교회 지하실에서 주크박스를 하나 발견했다. 알고 보니 이 주크박스는 사교 공간 ‘클럽 57(Club 57)’의 것으로, 교회가 돈을 벌게 해주려는 의도로 갖다둔 것이었다. 만약 이스트 빌리지의 정수를 한 공간에 담을 수 있다면 클럽 57이 바로 그런 공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곳에서는 자유 시 낭송 행사, 댄스 파티, DJ 세트, B급 영화 상영회 등이 열렸다. 해링은 2달러를 내고 그곳의 35번째 회원이 되었다.

구치는 젊은 예술가였던 해링이 뉴욕 거리를 걷다 수시로 아이디어를 얻던 모습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예를 들어 그는 플랫아이언 지역을 걷다가 버려진 사진 촬영용 배경지 몇 롤을 발견하고는 작업실까지 끌고 와 그 위에 잉크로 그림을 그렸다. 작업을 마치고 짬이 날 때면 부지런히 인터내셔널 스터드(International Stud)라는 게이 바를 들락거리며 땀에 젖은 모험을 계속해나갔으며, 같은 반 친구와 함께 퍼스트 애비뉴에 있는 아파트에 이사했을 땐 작은 성기 그림으로 벽을 빼곡히 채웠다. “시간의 90%를 섹스에 집착하며 보내요. 그게 작업의 주제가 돼요.”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예술은 다다이스트들의 자동기술법이나 피에르 알레신스키(Pierre Alechinsky)의 낙서 같은 추상적 표현의 정신을 본받아 최소한의 의식적 계산도 없이 만들어내는 예술인 듯했다. 세상에 대한 통찰이나 기교가 아니라 즉흥성이 그의 붓이었고,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가 아니라 클럽 57이 그의 모교였다. 그 집단은 노래나 말 또는 디제잉을 하는 찰나에만 존재하는 행위의 무상함을 받아들였다. “우린 서로를 위해 그렇게 했어요.” 클럽 매니저였던 앤 매그너슨(Ann Magnuson)이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또 새로운 걸 시작했죠.” 어쩌면 그건 젊은 해링의 모토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가끔 정치적인 목적을 담고 있기도 했다. 201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클럽 57(Club 57)> 전시가 그중 하나다. 1981년의 한 콜라주 작업에서 레이건은 나치 친위대 모자를 쓰고 쇼걸의 다리 위를 활보하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전시 도록에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그가 러시아와 핵전쟁을 시작할 거라 확신했기에 미친 듯한 속도로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 핵은 발사되지 않았고, 대신 에이즈 전염병으로 수천 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그중 상당수는 게이 뉴요커였다. 레이건은 1987년이 되어서야 그 사안에 대해 주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는 에이즈 발병 사례가 처음 보고되고 나서 6년이나 지나서였고 해링이 에이즈 증상을 보인 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키스 해링은 뉴욕 5개 자치구의 벽과 지하철뿐 아니라 어디든 캔버스로 삼았다. 사진은 안무가 빌 T. 존스(Bill T. Jones)를 보디페인팅 중인 모습.

성공은 빠르게 퍼지는 마약과도 같았다. 해링은 본래 쥐가 들끓는 지저분한 지하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는데, 점차 도쿄에서 작품을 홍보하고 마돈나와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서 그와 자주 어울린 친구 중엔 앤디 워홀도 있었다. 1986년, 해링은 소호에 아트 상품 매장을 열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그래피티로 뒤덮은 후 그곳에 팝 숍(Pop Shop)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싼 가격 때문에 해링의 오리지널 작품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곳에서 티셔츠라도 샀다. 이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걸어 다니는 광고판 역할을 하는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왔다. 해링에게 이것은 모두가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의미했다. 그는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 말하곤 했다.

그때쯤 이미 자신에게 맞는 표현법을 확실히 정립한 그는 커다란 직사각형 벽돌이나 철판 혹은 캔버스 위에 네온 컬러, 에나멜, 아크릴 물감으로 작품을 그려나갔다. 유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는데, 너무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는 딱딱하고 인공적인 느낌이 나며 빨리 마르는 재료를 선호했다. 그의 그림에는 지폐, 하트, 지구, 기어다니는 아이 등 몇몇 단순한 형태가 반복적으로 등장했고, 제빵사가 생일 케이크에 스프링클을 흩뿌리듯 위치나 색깔에 대한 별다른 의도 없이 평면적인 화면 위에 그 이미지를 그렸다. 어쨌거나 밝고 단순한 만화체 그림은 ‘그의 것’이 되었다.

해링에 대해 가장 안타깝고도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1970년대에 퍼포먼스 타입 예술가로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갤러리 타입 작가의 길을 걸으며 결국 평범한 화가가 됐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밝은 막대 인간 작품에서 심오함을 발견해주길 바랐다. 사소한 이야기지만 그가 운 때문에 크게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머물던 장소에도 운이 따랐고, 타이밍엔 더 큰 운이 따랐으며, 가장 큰 운이 따른 건 그의 피부색이었다. (이 말이 너무하다 싶다면 그에 대한 CBS 뉴스를 다시 한번 보고 댄 래더(Dan Rather)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백인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실패하는 모습을 보라.)

해링이 그린 이미지의 핵심은 그 뻔함에 있다. 클럽 57에서의 더 자극적인 노력과 달리, 그의 반레이건 콜라주 작업 ‘레이건: 레디 투 킬(Reagan: Ready to Kill)’은 신문에서 오린 글자와 백인 우월주의자의 사진을 함께 배치한 것으로(대체 무슨 의미인지!),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1985년 ‘생명의 나무(Tree of Life)’에서 나무가 녹색인 이유는 녹색이 생명의 색이라서라든가, 1988년 장 미셸 바스키아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한 ‘장 미셸 바스키아를 위한 한 무더기의 왕관(A Pile of Crowns for Jean-Michel Basquiat)’에서 왕관의 색깔이 검은색인 이유는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이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게다가 1984년 그린 그림에서 돈을 퍼먹는 자본주의의 돼지는 말 그대로 돼지다.

해링이 전보다 덜 직접적인 작업을 시도하자 그의 단점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1985년 작업한 성기와 불꽃, 웃고 있는 짐승으로 가득한 무제 작품은 뻔뻔한 욕망을 암시하며 놀랍게도 자신감이 넘친다. 그 작품은 지옥을 보는 것 같은데, 그림의 대부분이 곤죽처럼 보였다.

해링처럼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신경에 거슬리는 유명 작가가 너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해링이 부인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퍼포머이자 아이들을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다정했던 상냥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병에 대해 당당히 밝힌 순교자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1984년 그는 “진정한 비판적 탐구의 부재”라는 그에 대한 평가(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라이벌이었던 에릭 피슬(Eric Fischl)이 뉴욕 현대미술관의 모든 관심을 싹 쓸어갔다)에 불평하며 자신의 창의적 영향력에 대한 글을 썼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해링은 자신의 주제를 깊이 있게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중 한 방법은 예술과 그것이 지지하는 명분을 하나로 합쳐버리는 것이다. 해링은 반아파르트헤이트 그림을 그렸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에이즈 운동 단체 액트 업(Act Up)을 위한 포스터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악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See No Evil, Hear No Evil, Speak No Evil)’를 만들었다. 1989년에는 사비를 들여 그것을 2만 부 인쇄했다. 물론 이는 숭고한 행동이다. 액트 업 포스터는 해링의 작업 중 미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이미지다. 평상시보다 뭘 더 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덜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저 사람들을 그림 앞으로 모여들게 만들기만 하고, 그다음부터는 사회운동가에게 넘기면 될 일이었다.

해링은 1990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따스함으로 가득한 나날을 보냈다. 동료 예술가들과 대학 동기들이 그를 찾아왔고, 마돈나는 캘리포니아에서 그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죽기 얼마 전 그는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부터 협업을 논의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보헤미안으로 살다가 백만장자가 된 그를 경멸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단 해링의 벽화에 ‘크고 귀여운 똥(Big Cute Shit)’이라는 말을 적어 훼손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해링이 돈 때문에 예술가의 자존심을 팔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핵심에서 살짝 벗어난다. 초창기부터 뉴욕의 그래피티에는 어딘가 상업 예술 냄새가 났다. 바스키아만 보더라도 자기 그림이 갤러리에 걸리기 훨씬 전부터 그림에 저작권 심벌을 새겨두었다. 해링은 그래피티를 배신한 예술가라기보다는 그들의 꿈을 현실로 이뤘을 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해링의 명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를 퍼포먼스 예술가로 여기는 사람은 드문 반면에 그가 너무 저평가됐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수수께끼 같은 침묵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계속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이다. 최대한 요란하게 자기 작품을 대중적이면서도 이지적인 예술로 포지셔닝한 뒤, 사람들이 그에 대해 실컷 떠들게 해야 한다. 논란은 사그라들 줄 모른다. 언제든 그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게 더 좋기에 논란은 계속된다. 제프 쿤스나 데미안 허스트도 그랬으며, 어쩌면 키스 해링의 경우에는 영원히 종식되지 않을지 모른다. 지지자들의 열렬한 추앙의 대상이자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의 넌더리 나는 즐거움의 대상, 디즈니와 협업하고 지난해 로스앤젤레스 브로드 뮤지엄(Broad Museum)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의 주제가 되었으며, 아트 바젤 바젤2024의 언리미티드 섹터에서 다시 한번 존재감을 드러낸 인물. 어쩌면 그는 우리가 간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리한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