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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고티에와 함께, K-뷰티 비주얼 아티스트 SIL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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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빛깔로 서울, 로스앤젤레스, 파리에서 다채로운 역량을 펼치는 K-뷰티 비주얼 아티스트.

SILLDA @sill.da

눈과 입술, 손 등 신체를 활용한 그림을 많이 그리죠.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불을 지피는 스파크가 필요하잖아요. 도쿄에서 태어나 말이 서툴고 엉망이었던 저는 어렸을 때부터 타인에게 자주 오해를 받곤 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직관적이고 선명하게 상대를 이해시키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겼어요. 콤플렉스에서 시작된 욕구가 제 언어가 되어버린 셈이에요. 감정이 모호하게 머릿속에만 있을 때에 비해 물리적으로 뱉어져 나온 걸 직접 눈으로 보고 이해할 때는 그 무게가 달라지죠.

그림 속 여인의 메이크업이 본인 것과 닮았어요.

‘메이크업’이란 무의식적으로 욕망이 많이 담기는 행위예요. 무엇을 신경 쓰는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어떤 취향을 지녔는지 드러나죠. 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다 보니 그림이 저를 닮았어요. 예를 들어, 저는 원래 각진 눈썹이었어요. 그런데 어릴 적 제 마음이 모난 이유가 모난 눈썹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눈썹을 동그랗게 깎고 둥글게 그렸어요. 그림 속 인물도 그렇게 그리고 있더라고요.

유독 빨간색이 많이 보여요.

인물이든 정물이든 선에서 명암, 포인트 부분까지 빨간색으로 시작해 빨간색으로 끝나요. 사실 처음엔 재미로 한 톤으로 그리기도 있는데 하다 보니 하나의 색만으로도 감정이 모두 다 표현되더라고요. 가장 연약한 부분부터 강한 부분까지요. 빨간색을 기준으로 옆에서 상호작용하는 파트너 색상이 있어요. 주변 색이 무엇이냐에 따라 빨간색의 역할과 의미가 달라지거든요. 빨간색이 채도가 강한 색을 만나면 ‘쨍’ 하고 부딪쳐요. 파스텔 톤과 만나면 짓눌리고, 어두운색 사이에 있으면 찬란하게 빛이 나죠. 이렇게 색과 색에 관계성을 부여하면서 작업하는 편입니다.

평소 빨간 립스틱을 좋아하기도 하죠?

열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레드 립을 발랐어요. 주변인 모두가 아는 저의 엄청난 강박이었죠. 잘 때도 지우는 게 싫어서 바르고 자거나, 아침에 눈뜨자마자 양치하기도 전에 발랐어요. 새빨간 입 덕분에 온갖 별명과 사회적인 시선, 클리셰 등 빨간색에 대한 많은 사람의 데이터가 쌓여갔어요. 빨간색만큼 제가 잘 아는 색은 없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릴 때 선호하는 색 조합이 있다면요.

보색대비를 좋아해요. 레드 립을 발라왔던 제 옷장에는 초록색 옷이 가장 많아요. 초록이 좋은 이유도 빨강을 더 빨강답게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제 얼굴도 연두색이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영감을 주는 색도 초록색이에요. 차갑고 청량한 초록이요. 제일 좋아하는 맛도 녹차, 민트, 멜론입니다. 반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건 개구리랑 애벌레예요. 애정하는 것과 혐오하는 것이 모두 초록색이라니, 재밌지 않나요?

당신이 생각하는 색의 미학은 어떤가요?

색은 그야말로 감정과 부딪치는 장치예요. 불안하거나 상처 입은 것들을 아주 화사하게 그리는 거죠. 그런 모순되는 지점으로 서로가 가진 의미를 색으로 극대화하고 싶어서요. 또한 어떤 공간으로 데려가는 색이 참 좋아요. 무슨 의미냐면, 저는 색을 정할 때 날씨, 계절, 바람, 시간 등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편이거든요. 그림을 그릴 때 4월의 화창한 오후 2시 정도를 자주 떠올리는 편이에요. 비릿한 여름일 때도 있고요. 비를 머금은 습한 바람 자체를 떠올릴 때도 있어요. 물론 햇빛이 전혀 없는 이질적인 공간도 있고요. 이렇게 상상하면서 그리면 아주 즐거워요.

손가락으로 변신한 피아노 건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꽃···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느낌이 묻어나요. 소재와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요?

제겐 상상하고 꿈꾸는 것이 일상이거든요. 노트에는 항상 100개 이상의 스케치가 쌓여 있고, 그중에서 가장 공감되는 스케치를 선택해 작업을 시작해요. 오히려 창의성과 상상력은 절제하는 편이죠. 상상하는 훈련이 몸에 배어버린 건지, 괴롭게 작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더라고요. 경험하지 않은 상황이 눈앞에 드라마처럼 선명하게 연상되어 펼쳐지는 경우도 있어요. 최근 바다에 갔다 왔는데, 도무지 파도 소리와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머릿속으로 다른 상상을 하느라 현실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거죠. 그래서 모래사장에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고 뇌 안에 있는 TV를 끄는 상상을 했어요. 요즘은 눈앞에 놓인 실재하는 것들을 더 눈에 담으려고 해요.

어떤 작업이 기억에 남나요?

최근 장 폴 고티에와 할로윈 시즌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좋은 의미로 저만큼 매우 디테일하더라고요. 스케치를 보낼 때마다 20개의 피드백이 돌아왔어요. 그들 의견을 전적으로 믿었을 때 또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해졌어요.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공중에 떠오른 사과 그림도 굉장히 특별해요. 평범한 사과 한 알도 무언가처럼 벅차게 느껴지는 어느 예민한 날에 그렸거든요. 모든 정황과 흔적은 사과라고 가리키지만, 내 눈에는 그게 도무지 사과로 보이지는 않았죠.

아티스트로서 여전히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색에 대한 도전이요. 문득 빨간색을 쓰지 않고도 과연 내 그림처럼 그릴 수 있을까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빨간색이 들어가지 않은 작업도 해보고, 최근엔 어두운 배경에서 벗어나 환하고 밝은 공간에서 으스스한 느낌을 내보고 싶어서 ‘비웃는 이들에 관하여’라는 그림도 시도해봤어요.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건 힘을 빼고 덜어내는 것이더라고요.

당신에겐 그림이 세상과 교감하는 언어예요. 앞으로 어떤 대화를 하고 싶나요?

불안을 아주 아름답게 그려내고 싶어요. ‘나의 불안은 아름답다. 그러니 괜찮다.’ 이 정도의 가벼운 위로로 세상에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요.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