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임윤찬의 뉴욕 필하모닉 데뷔를 성사시킨 미숙 두리틀
지금 미술·건축·클래식·영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뜨거운 장면을 〈보그〉가 정조준했다. 태피스트리와 조각이 부흥 중인 현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애니 모리스의 한국 첫 개인전을 비롯해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가 홍콩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연결한 더 헨더슨에 안착한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의 새 본부,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이 세계를 흔드는 지금, 한국 클래식계의 숨은 공로자인 미숙 두리틀, 영화 산업에서 여성의 위상을 높이고자 제정된 까멜리아상의 첫 수상자인 류성희 미술감독까지, 문화계는 추수와 동시에 씨를 뿌리는 중이다.
모든 악기가 멈춘 자리, 뉴욕 필하모닉 이사 미숙 두리틀이 홀로 남아 여운을 삼킨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조성진, 임윤찬의 뉴욕 필하모닉 데뷔를 성사시킨 그는 더 넓은 세상을 갈망하는 한국 클래식계의 든든한 후원자다.
서울 필동에서 태어난 미숙 두리틀(Misook Doolittle)은 더는 한국에 살지 않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7년 동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멧 오페라)의 후원자로 활약한 그가 2017년 뉴욕 필하모닉(뉴욕필)에 합류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가 내건 유일한 조건은 매년 한국인 연주자를 초청하라는 것. 이후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소프라노 박혜상,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뉴욕필에 입성했고, 임윤찬은 한국인 아티스트의 뉴욕필 데뷔를 위해 5년간 조성하게 된 기금의 첫 번째 수혜자로 뉴욕 링컨 센터 데이비드 게펜 홀 한가운데 섰다.
1974년, 미숙한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미술 유학을 떠나고, 타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브랜드 ‘익스클루시브 미숙’을 론칭했으며, 남편이 세운 ‘해리 앤 미숙 두리틀 재단(Harry and Misook Doolittle Foundation)’을 이끌고, 미국 클래식계에서 가장 대범한 한인 후원자가 되기까지, 미숙 두리틀은 항상 최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 집중했다. “뒤를 잘 돌아보지 않아요. 다 할 순 없으니 선택을 잘해야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중요하다. 성과와 성공은 다음 도전을 위한 든든한 추진력이 돼주니까. “훌륭한 한국인 아티스트를 우리 힘으로 데려와 전 세계 관객에게 선보인다는 것. 아주 좋은 일 아니겠어요? 이렇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어요.” 들뜬 마음으로 잠시 고향을 찾은 미숙 두리틀이 <보그>에 건넨 이야기는 단순한 삶의 원칙과 음악에 대한 열정, 일상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가득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에서 파인 아트를 공부하고, 패션 사업을 시작한 끝에 지금은 멧 오페라와 뉴욕필의 후원자로 활약 중이다. 언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졌나?
숭의여고를 다녔는데 기독교 미션스쿨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가창 대회가 많이 열렸다. 아리아도 그때 배웠다. <카르멘>, <리 골레토> 같은 오페라를 고등학교 1~2학년 때 봤으니까. 의외로 미국에서는 음악이 필수과목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때 얻은 음악적 자양분이 참 감사하다.
화가이자 남편이었던 해리 두리틀이 2005년 설립한 ‘해리 앤 미숙 두리틀 재단’을 통해 문화 지원 및 구제 사업에 뛰어들었다. 어떤 일을 벌였나?
컬럼비아 의과대학에 일부 교수직을 마련하고, 뉴욕 원각사에 명상 센터도 지었다. 워낙 오페라를 좋아하다 보니 오페라 작품을 꾸준히 후원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뉴욕필에 이르게 됐다. 내가 만든 패션 브랜드 ‘익스클루시브 미숙’을 미국에 무사히 안착시키기 위해 미친 듯이 스스로를 몰아붙일 때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시티 하베스트(City Harvest Food Rescue Center)는 살아생전 남편이 특히 중요하게 여겼던 구호단체 활동으로 유명 셰프들까지 다 함께 힘을 합쳐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음식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시티 하베스트에서는 1년에 두 차례 갈라 행사를 여는데 한 번에 모이는 기금이 10억원에서 20억원 정도다. 패션 회사를 매각한 내게 재단을 맡기며“분명 삶이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 말한 남편의 확신은 진짜였다.
꾸준히 멧 오페라를 후원하다가 뉴욕필 이사직 제의까지 수락한 사연은?
지금은 뉴욕필 회장이 된 데보라 보다(Deborah Borda)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아주 다이내믹한 여성으로 최근 뉴욕필의 데이비드 게펜 홀을 정말 멋지게 새로 디자인했다. 데보라와 함께 있으면 늘 재미있다. 1949년생이지만 젊음의 기운이 흘러넘친다. 게다가 아주 멋쟁이다.
이사직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매년 한국인 연주자를 불러들이는 조건을 내세운 건 어떤 마음 때문인가?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랄까. 후원을 하다 보니 무조건 돈을 준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나도 아이디어를 내면서 뭔가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나. 3년 전 작고한 남편의 추모 공연을 제안한 뉴욕필에 이왕이면 임윤찬이 뉴욕필에 오는 때를 노려보자는 의견을 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뉴욕필 이사직을 수용하면서 향후 5년 동안 한국인 아티스트의 뉴욕필 데뷔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건넨 것도 마찬가지다. 돈을 쓰더라도 가치 있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뉴욕필 데뷔 공연을 후원하기 전부터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소프라노 박혜상 등의 뉴욕필 데뷔를 후원했다. 바로 앞에서 한국 아티스트의 뜨거운 활약을 지켜보는 기분은 어떤가?
매번 관객이 무대를 열렬하게 좋아해주었고, 그때마다 당연히 아주 자랑스러웠다. 지난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선보인 임윤찬의 데뷔 공연에서는 사람들이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임윤찬을 위한 프라이빗 파티를 열어줬는데 그때 개인적으로 찍은 영상은 봐도 봐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최근 친구와의 부산 여행에서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의 ‘향수’라는 곡을 우연히 들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목소리도 매우 좋고, 음악을 참 잘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 외에도 계획 중인 후원 프로젝트가 있다면?
이번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소속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이 뉴욕필로 온다. 베네수엘라에서 가난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아주 멋진 연주자인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그리고 한국 음악계에서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는데 한국을 떠난 지 너무 오래돼 아직 사정을 잘 모르겠다.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고민해볼 생각이다.
후원의 원칙 혹은 방향성이 있나? 미국에서 활동하며 특히 좋다고 여긴 후원 문화가 있는지 궁금하다.
따로 없다. 바른 일을 하고, 정당한 일을 하고, 비리가 없으면 된다. 미국은 모든 면에서 상당히 ‘클리어’하다. 자본주의의 최전방에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부자들 사이에서는 ‘어차피 못 쓰고 죽을 돈, 사회에 이바지하자’는 생각도 꽤 굳건하다.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은 정말 많이 한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세상에 관심이 있고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미술과 패션 디자인을 지나쳐 끝내 음악에 정착한 이유는 뭘까? 당신이 생각하는 음악의 힘은 무엇인가?
음악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훨씬 빨리, 깊이 닿는다. 미술보다 음악으로부터 얻는 힐링이 훨씬 더 즉각적이다. 남편도 화가였고 오랜 시간 미술을 좋아했지만 소리에서 느끼는 위로는 정말 강력하다.
뉴욕필의 모든 공연을 빠짐없이 감상하는 편인가?
트라이 투(Try to)!’ 뉴욕필 전용 극장인 데이비드 게펜 홀을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드나든다. 일과 별개로 좋은 오페라는 몇 번씩 보곤 하는데 최근에는 소프라노 박혜상과 <토스카>의 테너 백석종의 공연이 내 마음을 차지했다. 멧 오페라와 뉴욕필에는 공연 외에도 좋은 프로그램이 많아서 그걸 다 소화하느라 뉴욕에서의 삶은 무척 바쁘게 흘러간다. 그래도 지치지는 않는다. 모든 게 기쁘고, 감사할 뿐이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