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Октябрь
2024

벽과 조명이 움직이는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의 새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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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술·건축·클래식·영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뜨거운 장면을 〈보그〉가 정조준했다. 태피스트리와 조각이 부흥 중인 현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애니 모리스의 한국 첫 개인전을 비롯해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가 홍콩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연결한 더 헨더슨에 안착한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의 새 본부,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이 세계를 흔드는 지금, 한국 클래식계의 숨은 공로자인 미숙 두리틀, 영화 산업에서 여성의 위상을 높이고자 제정된 까멜리아상의 첫 수상자인 류성희 미술감독까지, 문화계는 추수와 동시에 씨를 뿌리는 중이다.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가 설계해 그 자체로 미래 유산이 될 더 헨더슨에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의 새 본부가 들어섰다. 움직이는 벽과 섬세한 조명, 아름다운 층계로 쌓아 올린 이곳에서 이제 막 첫 번째 경매를 치렀다.

홍콩의 새 랜드마크 더 헨더슨에 안착한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의 새 본부.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와 컬렉티브 스튜디오의 협력으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같은 공간이 탄생했다.

“자유와 유연성(Freedom and Flexibility).” 크리스티안 알부(Cristian Albu)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 부회장이 홍콩 센트럴에 문을 연 새로운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 본부의 핵심으로 이 두 가지를 꼽았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가 설계한 ‘더 헨더슨(The Henderson)’ 빌딩은 최첨단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성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019년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이 새 본부에 대한 포부를 밝힌 직후 프로젝트 테이블에는 크리스티와 헨더슨 그룹,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와 건물주가 전략을 꾀하는 지휘관들처럼 모여 앉았다. 뒤이어 홍콩 최고의 랜드마크를 탄생시키겠다는 비전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고, 크리스티는 이 건물의 6층부터 9층까지 총 4개 층을 점하게 됐다(남은 층에는 오데마 피게, 칼라일, 캐나다 연금계획투자위원회 등이 순차적으로 들어선다). 마침 뿌듯한 성취를 알리기 좋은 시기다. 미술과 럭셔리 시장에 불어닥친 위기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는 올해 상반기에 총 21억 달러, 약 2조9,000억원의 경매 총액을 달성했다(7월 16일 환율 기준). 이 시기 경매에서 거래된 고가 작품 상위 10점 중 6점이 크리스티에서 출품된 것이었다.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 총괄 사장 프랜시스 벨린(Francis Belin)은 날카로운 눈으로 몇 가지 청신호를 더 감지했다. “영 컬렉터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SNS를 비롯해 다양한 루트를 통해 젊은 컬렉터들이 유입되고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현대 미술은 물론 고전 미술, 고미술, 서양 고전 미술 등 관심사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럭셔리 경매도 강세를 보였습니다. 까르띠에 인디아 뚜띠-프루티 목걸이(낙찰가 약 121억원), 파텍 필립 2523J(낙찰가 약 115억4,000만원) 등 유색 보석과 빈티지 시계, 와인을 아울러 의미 있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럭셔리 아이템이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죠.”

개관식이 열린 더 헨더슨의 6층 로비가 미래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

6층 로비에서 열린 개관식이 끝난 후 스탠리 큐브릭의 SF 영화에 나올 법한 미래적인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가 디자인한 앙증맞고 메탈릭한 계단을 통해 7층으로 향했다. 지난 9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진행된 20세기 및 21세기 이브닝 및 데이 경매를 앞둔 144점의 미술품이 다소 어두운 조명 아래 들뜬 자태로 걸려 있었다.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의 손길이 닿은 공간을 섬세하게 매만진 컬렉티브(Collective) 스튜디오의 창립자 베티 응(Betty Ng)이 이곳에서 첫 방문객을 맞이했다. 그는 홍콩 엠플러스 뮤지엄을 비롯해 전 세계 곳곳의 박물관과 갤러리를 디자인한 베테랑 건축가다.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기 전 무려 2년 동안 인터뷰를 진행하며 크리스티의 비전을 파악한 그는 마침내 건물 안의 모든 요소가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은 공간을 완성했다. “체스 말처럼 움직이는 벽과 조명을 통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갤러리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빛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두 가지 블라인드와 나무와 메탈 등 서로 다른 소재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 친환경 건물 인증 제도에서 최고 등급을 획득할 만한 지속 가능한 설계(크리스티는 2021년 지속 가능성 전략을 발표한 첫 번째 메이저 경매사가 되었고, 이후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대 50%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GCC(Gallery Climate Coalition) 가입과 NFT 플랫폼의 출시 등이 그런 친환경 정책의 일환이다) 등이 더해졌다. 모든 것이 크리스티의 비전대로였다. 이곳에서 나는 일주일 뒤면 약 95억5,000만원에 판매되어 앞으로 다시는 만나기 힘들 김환기의 전면 점화 ‘9-XII-71 #216’(1971)을 한참 동안 감상했다.

전시 규모와 성격에 따라 움직이는 벽과 조명을 통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갤러리 공간.

매년 적당한 공간을 빌려 1년에 딱 두 번(5월과 11월) 경매를 열었던 크리스티는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일을 벌일 수 있게 됐다. 이는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이 랜드마크를 세우는 것보다 더욱 기대했던 일이다. 알록달록한 라이브러리와 천장에 닿은 와인 셀러가 있는 8층에서 마주한 크리스티안 알부가 말했다. “가장 기대되는 건 공동체와 더 친밀한 대화를 시작하게 됐다는 거죠. 이곳에 고객을 초대하고, 언제든 우리가 원할 때 아트 페어와 전시,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내주며 미술 학도와 예술 애호가, 정치인과 빅 컬렉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닿지 못한 세대와 만나게 되었으며 디자인과 패션, 가구 등에 걸쳐 전에 없던 새로운 협업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죠.” 2024 프리즈 서울 기간에 처음으로 방문했던 송은에서 느낀 따뜻하고 친밀한 분위기가 좋았다고 회상한 알부는 새 본부가 열띤 만남의 장이 되길 소망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기대처럼 올 한 해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은 빼곡한 이벤트를 선보인다. 약 427억원에 낙찰된 빈센트 반 고흐의 ‘정박한 배(Les canots amarrés)’(1887)가 주도하며 이성자를 비롯해 총 8명의 작가가 경매 최고가를 경신한 신규 본부 개관 기념 20세기 및 21세기 경매 이후 10월에는 럭셔리, 11월에는 아시아 고미술 경매가 차례차례 열린다. 이 외에도 개관 프로그램으로 10월 29일에는 아트+테크 서밋, 11월 7일에는 크리스티 상하이 경매 등을 진행한다.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 총괄 사장 프랜시스 벨린.

그러나 이 또한 더 큰 무대의 시작일 뿐이다. 하나의 성취는 만족감을 줄 뿐 아니라 더 큰 꿈을 꾸게 한다. 크리스티안 알부의 시선 역시 더 먼 미래에 닿아 있다. “트렌드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와 품격입니다. 크리스티에서 일하면서 작품의 인기보다 중요한 것은 퀄리티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죠. 젊은 예술가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작품은 경매사에 도착하기 전에 훌륭한 예술 재단에 먼저 걸려야 합니다.” 프랜시스 벨린 역시 크리스티는 역사와 의미를 판매하는 경매사임을 강조했다. 이는 근사한 홍보성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중요한 통찰을 조준한다. “서로 다른 작품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잘 설명하고, 그 의미를 알리는 것 역시 경매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새 본부를 통해 우리가 주목한 아시아 작가들이 더 많은 글로벌 컬렉터의 눈에 띄길 바랍니다. 이우환 이후 이성자 같은 한국 여성 작가들, 특히 1960년대 작품이 저평가돼 있다고 느껴요. 다행히도 홍콩은 지역이 아니라 글로벌한 시장이죠. 김환기, 이성자의 작품을 모네, 반 고흐와 동일한 플랫폼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한국 미술 시장에도 굉장한 빛을 드리우는 기회일 것입니다.” 내 앞에는 자크송 뀌베 746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왕가의 굳건한 사랑을 기념하며 탄생한 자크송 샴페인처럼 앞으로 더 헨더슨에서 연결된 수많은 이들이 반가운 악수를 나누게 될 것이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