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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플랙이 만든 현대판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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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플랙의 삶은 사진 같은 정교한 묘사와 온갖 색채로 범람하는 그의 그림처럼 휘황찬란했다. 예술가이자 엄마였던 플랙은 그런 자신의 삶을 압축하려는 모든 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 아티스트다.

‘Self Portrait with Flaming Heart’, 2022

1970년대 초, 아티스트 오드리 플랙(Audrey Flack)은 ‘마카레나 에스페란사(Macarena Esperanza)’라는 나무 조각상을 보기 위해 세비야에 있는 마카레나 대성당을 찾았다. 눈물을 흘리는 성모상으로 이름을 날린 마카레나 에스페란사는 다양한 색으로 채색되었으며 보석과 크리스털, 눈물을 형상화하는 유리 조각과 가짜 속눈썹 등으로 화려하게 꾸민 조각상이다. 플랙은 유대인이지만 이 조각상의 슬픔에 깃든 화려함에 꼼짝없이 압도되고 말았다. 아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에 깊이 공감한 측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압도한 건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장엄하고 웅장한 아름다움이었다. 조각상 사진을 찍어 뉴욕 집으로 돌아온 플랙은 그 사진에서 받은 영감으로 연작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선명한 고해상도로 조각상의 휘황찬란한 모습과 정교한 묘사까지 생생하게 담아낸 초현실적인 그림이었다.

연작 중 하나인 ‘기적의 마카레나(Macarena of Miracles)’(1971)는 1972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평론가들은 플랙이 조각상에 만화 같은 눈물을 추가해 여성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식으로 그 조각상의 싸구려 예술품 같은 측면을 조롱하는 것이라 여기고 찬사를 건넸다. 그러나 막상 플랙이 그런 해석을 정정하고 자신은 조각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 노력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평론가들은 입장을 바꿔 그의 조각상을 저속한 작품으로 날 세워 혹평하기 시작했다. 플랙의 다른 마카레나 조각상 그림과 훗날 그가 작업한 포토리얼리즘적 정물화에 대해서도 같은 평가가 들려왔다. ‘너무 감상적이다’ ‘지나치게 여성스럽다’ ‘싸구려 같다’ 등등. 그러나 플랙은 그런 말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A Brush with Destiny’, 2023

플랙은 작업 초창기에 듣게 된 그와 같은 비난을 죽을 때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제가 워낙 시대를 앞서가는 편이라서요.” 지난 1월, 죽음을 몇 달 앞둔 92세의 플랙이 놀랍도록 정정한 모습으로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자리한 그의 자택 겸 작업실을 찾은 내게 말했다. 그는 1950년대에는 표현주의 작업에 집중했고, 1970년대부터 포토리얼리즘에 뛰어들어 선구자가 되었으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1980년대에는 공공 조각 분야로 도약했다. 플랙은 선생님이자 작가, 음악가였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타이틀은 두 딸의 어머니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플랙은 자신의 회고록 <With Darkness Came Stars(어둠이 오면 별이 뜬다)>의 발간을 앞둔 상태였는데(책은 펜 스테이트 유니버시티 프레스 출판사를 통해 최근 출간됐다) 그의 광범위한 예술 세계와 살아가면서 겪은 주요 사건을 다룬 책이었다. 폭력으로 가득했던 첫 번째 결혼 생활과 자폐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 역시 모두 실려 있었다. 플랙은 또한 홀리스 타가트(Hollis Taggart) 갤러리에서 지난 5월 열린 전시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결코 범상치 않은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담은 신작 16점을 소개했다. (오드리 플랙의 사후 첫 전시는 오는 10월 13일 패리시 아트 뮤지엄에서 열린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거예요.” 플랙이 홀리스 타가트에서 선보인 새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새 작품에는 알브레히트 뒤러와 엘리자베트 루이 비제 르 브룅, 절친하게 지낸 잭슨 폴록 등 역사적인 예술가와 대중문화 및 종교의 아이콘이 대거 등장한다. 예수 혹은 모세의 모습을 한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와 그의 동료 클레아처럼.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손끝에 닿아 있어요. 마법 같은 일이죠.” 플랙은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을 ‘포스트-팝 바로크’라 소개했다. “죽기 직전에 삶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하죠. 저는 92년이나 살아왔으니 엄청나게 많은 것이 떠오를 거예요.”

꽤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931년 뉴욕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플랙은 워싱턴하이츠에 거주하는 수많은 유대인 가족과 함께 성장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예술가가 되기를 꿈꿨다. 라과디아 고등학교의 전신인 음악 예술 고등학교(High School of Music & Art)를 다녔고, 이후 쿠퍼 유니언 대학에 진학했다. 화가 요제프 알베르스가 예일 대학교 디자인 대학에 아방가르드적 감각을 더하기 위해 쿠퍼 유니언에 재학 중인 플랙을 직접 예일 대학교 장학생으로 선발했다. “그는 ‘앙팡 테리블’ 작가의 이름을 대보라고 했고, 나는 내 이름을 맨 처음으로 말했다.” 플랙이 그의 회고록에 밝힌 내용이다.

플랙은 ‘아티스트 클럽’의 일원으로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 추상예술의 성지였던 그리니치빌리지의 시더 태번(Cedar Tavern)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아이콘인 잭슨 폴록과 리 크래스너, 프란츠 클라인, 윌렘 데 쿠닝과 함께 어울렸다. 플랙의 회고록에는 그 시대의 꿈같은 이야기가 한가득 실려 있다. 좋은 기억과 그렇지 않은 기억 모두 말이다. 그때만 해도 예술계에서 여성 혐오와 성희롱이 만연했고, 플랙은 시더 태번을 가득 메운 지나친 음주와 방탕한 생활에 질려버렸다. 존경하는 예술가이자 친구였던 폴록이 죽기 1년 전쯤 술에 취해 플랙에게 청혼한 후 그는 시더 태번에 발길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엉망이 된 잭슨의 얼굴을 보고 나니 더 이상 그 무리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플랙의 회상이다. 그렇게 플랙은 자신의 예술과 삶에서 더 탄탄하고 안정적인 땅을 찾아 추상표현주의로부터 벗어났다. 물론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나는 큰 대가를 치렀다. 나 자신을 지워야 했던 것이다.”

‘Chanel’, 1974

오래전 거장을 연구하기 시작한 플랙은 재현적인 구상회화(당시에는 너무나도 ‘핫하지’ 않은 장르였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키워가며 사실주의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60년대 말에는 포토리얼리즘을 이끄는 예술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모임에 속한 다른 작가들은 모두 남자였고, 그들의 작품에는 차와 트럭 등이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플랙은 립스틱과 진주 목걸이, 마릴린 먼로와 존 F. 케네디 같은 여성이 주로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을 작품에 자주 등장시켰다. “이미지에는 힘이 있다”는 플랙의 말처럼 그는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소재를 그렸다. 그러나 여성스러움을 전면에 내세운 그의 작업은 1970년대 초 마카레나 연작과 마찬가지로 거세게 비판받았고, 부정확하게 해석되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금기시되던 에어브러시를 들었을 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온갖 스캔들을 일으키며 자꾸만 높아져간 예술가로서의 명성과는 별개로 플랙의 개인적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자신을 학대한 첫 남편을 만난 것부터 심각한 자폐를 앓고 있는 딸을 키우며 겪은 어려움까지 그가 회고록에서 낱낱이 밝힌 것처럼 말이다. 플랙은 딸이 적절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당시는 자폐증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고 믿기 힘들겠지만 플랙을 포함한 아이의 어머니들이 비난의 대상이 됐다. 어려운 살림에 못 미더운 배우자를 둔 워킹 맘으로 고군분투하면서도 어떻게든 예술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전하는 것은 그에게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게 제 인생이에요.” 플랙이 말을 이었다. “저는 엄마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요. 엄마면서 다른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거죠.” 물론 성공도 찾아왔다. 플랙의 작업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등에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다. 그는 첫 번째 남편을 떠나 행복하게 재혼도 하고, 여러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활발히 활동해왔다. 그러나 포토리얼리즘 작가로서 그 명성이 정점에 달했던 1983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슬럼프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년 뒤 다시 예술로 돌아올 방법을 찾아냈는데 바로 조각을 통해서였다. 그때부터 플랙은 어딜 가든 작은 찰흙 더미를 들고 다녔고, 심지어 식당에서도 찰흙을 조몰락거리곤 했다. 이어 그는 여성이 지닌 다양한 힘을 상징하는 고대 여신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여신을 만드는 일에 도전했다. “메두사, 다프네, 메데이아가 나의 자매이자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그가 회고록에서 한 말이다.

1991년 포르투갈의 한 단체로부터 의뢰받아 17세기 인물인 카타리나 브라간사 왕비를 모델로 한 조각상 ‘Queen Catherine of Braganza’를 작업하는 플랙의 모습. 그러나 노예제도로 이득을 본 인물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억울한 비판을 받고 작업은 취소되고 말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그는 여러 대회에서 주요 상을 휩쓸며 내슈빌, 탬파, 록힐,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미국 각지에 공공 조각상을 세웠다. 1991년에는 포르투갈의 한 단체가 퀸스 자치구에 선물로 보낼 작품 제작을 의뢰했는데 플랙은 17세기 인물인 카타리나 브라간사 왕비(영국 왕 찰스 2세의 아내)의 10m짜리 조각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노예제도로 이득을 본 인물을 기념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프로젝트는 취소되고 말았다. 플랙은 이 일로 깊이 상심했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퀸스의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 혼혈인 사촌을 모델로 삼아 강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상을 제작하려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플랙은 비록 카타리나가 여왕 자리에 있는 동안 영국이 노예제도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카타리나는 오히려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인물이라고 피력했다.

최근 출간된 오드리 플랙의 회고록 <With Darkness Came Stars>.

최근 플랙은 다시 회화의 세계로 진입했다. 자서전을 쓰기 위해 수십 년간의 일기를 뒤적이자 누구보다 폭넓었던 예술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시간의 흐름을 다룬’ 그의 신작은 추상표현주의로 시작했던 출발점에서부터 포토리얼리즘적 정물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 장면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회화 버전처럼 보였다. 플랙이 덧붙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하나의 이름으로 정의하려 해요.” 그러나 그는 자신을 향해 세상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홀리스 타가트 갤러리에서 그의 전시가 열린 첫날, 쏟아지는 폭우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관람객은 작품이 지닌 섬세한 디테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고(이 정도 디테일은 누구에게라도 대단한 업적일 텐데, 90대 아티스트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이 결코 믿기지 않았다), 그의 서명이 담긴 회고록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섰다. 그날 내가 본 것은 무언가의 정점이지, 결코 끝은 아니었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