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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뒷모습도 역사가 될 수 있을까? 풍경 속 서성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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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복잡할 때면 사진전을 찾습니다. 좋은 사진 작업은 내가 발 디딘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이어내니까요. 이렇게 카메라 렌즈를 사이에 둔 연결과 단절의 순간에 생겨난 평온함이 저를 다독입니다. 모든 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위로하는 것 같습니다. 뮤지엄한미에서 만난 루이지 기리(1943~1992)의 사진을 통해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루이지 기리는 이탈리아 컬러사진의 선구자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 출신인 그는 지역의 일상 풍경을 뷰파인더에 담으며 독자적인 사진 세계를 구축했지요.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전시에서는 현실의 한 조각인 듯 환상의 세계인 듯, 기리의 오묘한 세계를 펼쳐 보입니다.

'Bologna', Natural Light series, 1973, C-print, 23.8×34.8cm.

1970년대부터 말년까지 루이지 기리가 포착해온 다채로운 풍경은 추운 겨울의 한기마저 거둡니다. 이탈리아의 일상 풍경, 공업지대의 스튜디오와 자택 내부, 미술관, 간판과 포스터 등 익숙한 공간에서 포착한 평범한 장면들이 유난히 신선하고 따스하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그의 사진이 특유의 정제된 색채, 자유로운 구도, 인간적인 유머를 두루 품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특히 ‘Grostè Refuge’라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데요. 하얗게 성에 낀 창문 너머 펼쳐지는 설산의 환영 같은 풍경이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까지 자극하더군요. 온 가족이 그림 앞에 서 있는 뒷모습은 또 어떤가요. 고전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들의 뒷모습처럼, 지금 나의 뒷모습도 일상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장치가 되지 않을까, 상상해보았습니다.

'Grostè Refuge', Italian Landscape series, 1983, C-print, 21.5×35cm.
'Salzburg', Natural Light series, 1977, C-print, 24×35.5cm.

루이지 기리가 유럽 컬러사진의 ‘시인’으로 불린 건 그의 사진들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 이면의 이야기를 더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진의 힘은 그가 1970년대에 개념미술 작가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사진 작업을 시작한 데서 기인합니다. 그의 작품에는 사진이 단순한 재현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재고하게 하는 사유의 도구라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기리는 사진으로 포착한 이미지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드러내는 일종의 창으로 보았습니다. 특정 이미지를 찍어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숨은 내러티브마저 함께 길어 올리는 거죠. 이 슴슴한 색채의 사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유일 겁니다.

'Modena', Still Life series, 1978, C-print, 22×15cm.

루이지 기리의 작품은 사진의 본래 역할, 즉 현실과 환영의 간극, 익숙함과 낯섦 사이 경계를 하나의 엄연한 세계로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그 사이에서 서성거리다 보면 ‘보는 방식’을 고민하게 되는데요. 특히 “풍경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풍경에 속하게 되는 감각을 느낀다”라는 그의 말은 숱한 이미지 속에 파묻힌 우리에게 꽤 유용한 잠언이 됩니다. 우리는 과연 좋은 것을 오래 보고 있을까요. 오래 눈에 담고 있나요. 아니, 우리가 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익숙한 시각적 습관에서 벗어나야 아이러니든 환영적 이미지든 마음껏 만날 수 있다는 진리는 비단 작가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닐 겁니다. 부디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 아까 마주한 삼청동 골목 풍경이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시는 3월 15일까지.

루이지 기리 개인전 'Infinite Landscapes' 모습.
루이지 기리 개인전 'Infinite Landscapes' 모습.
루이지 기리 개인전 'Infinite Landscapes'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