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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세대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새 시대의 일본 브랜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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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가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의 일입니다. 1981년, 당시 연인이었던 레이 가와쿠보와 요지 야마모토가 파리에 상륙한 것이죠. 둘은 패션이 단순히 ‘몸에 걸치는 의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유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이후 파리 패션 위크의 캘린더에는 일본 디자이너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해왔죠.

요지 야마모토 1983 봄/여름 컬렉션. Getty Images
꼼데가르송 1982 가을/겨울 컬렉션. Getty Images

데뷔 시기나 음악적 스타일에 따라 세대로 구분되는 K-팝 아이돌 그룹처럼 일본 출신 디자이너들을 분류한다면, 레이와 요지는 ‘1세대’가 되겠군요. 1970년 파리에서 브랜드를 론칭한 다카다 겐조와 1971년 뉴욕에서 쇼를 선보이며 개척자 역할을 한 이세이 미야케 역시 같은 그룹에 속하겠고요. 2세대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반입니다. 준 다카하시, 니고, 후지와라 히로시 등 ‘거리 위’에서 디자이너들이 피어난 것이죠. 레이 가와쿠보의 정신을 계승한 인물이자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이어오며 ‘일본식 스트리트 웨어’를 정립하는 데 기여한 준야 와타나베가 이름을 알린 것도 199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3세대로 분류할 수 있는 아베 치토세아베 준이치(최근 컬러 총괄 디자이너직에서 사임했습니다)가 등장합니다. 한때 부부이기도 했던 둘은 꼼데가르송에서 경험을 쌓은 뒤 각각 1999년과 2004년 사카이와 컬러를 론칭했죠. 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꼼데가르송의 패턴사로 입사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케이 니노미야도 빼놓을 수 없고요.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이 흐름을 이끄는 것은 이와이 료타, 소시 오쓰키 그리고 사토시 구와타입니다. 아프레쎄처럼 ‘과거의 클래식’에 기반하는 브랜드들 역시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존재감을 키우고 있고요.

Auralee 2025 F/W Menswear
Auralee 2026 S/S Menswear

오라리는 4세대의 ‘선봉장’ 격입니다. 요지 야마모토와 준야 와타나베 등을 배출한 패션 스쿨, 문화복장학원 출신의 이와이 료타가 2015년 론칭한 브랜드죠. 하지만 오라리의 디자인에서 문화복장학원 출신 특유의 ‘아방가르드’, 그러니까 급진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라리의 옷은 더없이 현실적인 동시에 민주적이죠. ‘풀 오라리’로 차려입고 출근하더라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인 것은 물론, 키 크고 마른 사람이 입어야만 어울리는 옷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라리는 파리 패션 위크 런웨이 데뷔 2년 만에(2024년 1월이었습니다) 일본 패션의 ‘넥스트’를 책임질 브랜드로 거듭났습니다.

Auralee 2026 F/W Menswear

그 비결은 최고급 원단과 완벽한 만듦새에 있습니다. 이와이 료타는 오라리를 론칭하기 전, 원단 도매 업체에서 일하며 소재에 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사람이 옷에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는 ‘좋은 옷’의 필요충분조건이 바로 좋은 원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죠. 오라리는 늘 최고급 원단을 사용해 직물을 개발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이후 ‘이 원단의 매력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옷은 무엇일까’ 고민하며, 누구나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옷을 디자인하죠. 최근에는 독창적인 스타일링과 컬러 매치로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타이트한 후디와 셔츠의 조합, 그리고 멀끔한 수트에 플립플롭을 매치한 룩은 우리가 일상생활 중 옷을 입는 방식에 영감을 주기 충분했죠. 원색과 ‘톤 다운’된 컬러를 조합하는 방식도 흥미롭고요.

Soshiotsuki 2026 F/W Menswear
Soshiotsuki 2026 F/W Menswear
Soshiotsuki 2026 S/S RTW

소시 오쓰키의 소시오쓰키, 그리고 사토시 구와타의 셋추 역시 꼼데가르송이나 요지 야마모토와는 완전히 다른 DNA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시오쓰키부터 살펴볼까요? 이와이 료타와 마찬가지로 문화복장학원을 졸업한 뒤 2015년 브랜드를 론칭한 소시 오쓰키는 일본의 과거에서 영감을 받는 디자이너입니다. 일본 경제의 황금기, 즉 1980년대 ‘버블 경제 시절’ 직장인들의 수트를 재해석하며 2025년 LVMH 프라이즈에 우승했죠. 과장된 숄더와 커다란 라펠, 그리고 엉덩이를 전부 덮을 정도로 긴 그의 블레이저는 아르마니의 ‘파워 수트’를 연상시키기도 하죠(그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사망 직후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어릴 때부터 아르마니의 수트와 셔츠를 수집했다고 밝혔습니다). 소시 오쓰키는 지난달 피티 워모에서 쇼를 선보이며 ‘한없이 일본스러운’ 브랜드만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기도 했습니다. 쇼 음악으로 쓰인 기타노 다케시 영화 <브라더>와 <소나티네>의 OST는 버블 경제 당시의 향락과 여유를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첫 조각을 덧대어 꿰매는 일본의 전통 기법인 ‘보로 기법’으로 만든 청바지 역시 눈에 띄었죠.

Setchu 2026 F/W Menswear
Setchu 2026 F/W Menswear

이와이 료타와 소시 오쓰키의 뿌리가 일본이라면, 2023 LVMH 프라이즈의 최종 우승자 사토시 구와타의 근간은 런던입니다. 도쿄에 거점을 둔 두 브랜드와 달리, 셋추의 본사(얼마 전 확장을 마친 본사 건물에서 2026 가을/겨울 남성복 쇼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는 밀라노에 위치하죠.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사토시 구와타는 ‘모던 테일러링’의 발원지인 새빌 로에서 테일러링을 배웠습니다. 이후 가레스 퓨(릭 오웬스의 수제자였습니다), 지방시 등 다양한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은 뒤 2020년 브랜드를 론칭했죠. 브랜드명은 ‘일본과 서양의 절충’을 뜻하는 와요셋추(和洋折衷)에서 따온 것인데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셋추는 서구적인 테일러링과 일본 특유의 ‘비워냄’이 공존하는 브랜드입니다. 사토시 구와타가 처음으로 디자인한 옷, ‘오리가미 재킷’ 역시 기모노와 블레이저를 결합한 결과물이고요.

@a.presse_
@a.presse_

아프레쎄는 앞서 언급한 세 브랜드와 달리 유럽에서 런웨이 형식의 쇼를 선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기는 셋에 비견할 만하죠. 아프레쎄는 수십 년 전 제작되었지만 아직까지 매력을 잃지 않은, 미국식 ‘대량생산 의류’와 군복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브랜드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디자인을 선보이죠. 얼핏 특별한 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프레쎄의 옷은 실제로 마주했을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고급 원단(일본의 의류 제작업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리고 세심한 워싱 디테일처럼 아프레쎄의 옷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사진으로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꼼데가르송과 요지 야마모토의 ‘파리 상륙’이 이루어진 지 45년 뒤, 비로소 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신세대 디자이너 집단이 등장했습니다. 각 브랜드의 무드와 궁극적인 목적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디자인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어떤 면에서는 궁극의 일상복을 지향한다는 유니클로의 철학, ‘라이프웨어’가 떠오릅니다. 30조원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는 패스트 리테일링 산하의 유니클로가 이를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 2013년의 일이거든요. 혁신과 해체를 외치는 것이 아닌, ‘삶과 밀접한 옷’을 고민하는 디자이너들의 시대가 막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