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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해피엔딩’의 박천휴와 윌 애런슨, 배우 9인의 해피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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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는 무조건 함께!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10주년 기념 서울 공연을 위해 브로드웨이에서 돌아온 작가 박천휴와 윌 애런슨, 그리고 10년 역사를 함께 완성한 배우 9명이 모두 모였다. 모든 장면, 모든 순간을 함께한 이들의 잊지 못할 하루에 <보그>가 유일한 관객으로 초대됐다.

(위부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신성민이 입은 하운즈투스 체크 수트는 바이랑(By Rang). 전성우가 입은 셔츠는 헌킴(Heon Kim), 팬츠는 페라가모(Ferragamo). 박지연이 입은 플라워 모티브 프린지 드레스는 페라가모. 전미도가 입은 러플 드레스는 유돈 초이(Eudon Choi). 박진주가 입은 리본 디테일 미니 원피스는 메종니카(Maison Nica). 김재범이 입은 벨벳 재킷과 베스트는 돌체앤가바나(Dolce&amp;Gabbana), 셔츠는 아모멘토(Amomento). 최수진이 입은 오프숄더 드레스는 메종니카. 박천휴의 스웨이드 재킷과 셔츠는 르메르(Lemaire). 방민아가 입은 모피 트리밍 니트 카디건과 스커트는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정휘의 재킷과 셔츠, 팬츠는 로에베(Loewe), 슈즈는 페라가모. 윌 애런슨이 입은 재킷은 코치(Coach), 셔츠는 아모멘토, 팬츠는 아르켓(Arket).

#1 비 오는 날, 화분을 산책시키러 나가는 클레어와 올리버. 몇 시간째 콘센트와 씨름 중인 어리바리 전기 수리공.

전미도의 스커트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스트래피 힐은 자라(Zara). 신성민의 체크 셔츠와 가죽 팬츠는 페라가모(Ferragamo), 슈즈는 캠퍼랩(Camperlab). 박천휴의 오버올은 파타고니아(Patagonia), 데님 셔츠는 디키즈(Dickies), 더비 슈즈는 닥터마틴(Dr. Martens).

다시 만난 순수의 기억, 전미도

농담에도 힘이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탄생을 함께한 전미도는 박천휴·윌 애런슨 작가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토니상 한번 받아야지.” 농담이 현실이 된 순간, 친구로서 감동이 먼저 찾아왔다. “언젠가 어디에서라도 인정받을 거라 여겼지만,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빨리 이루어진 것 같았거든요.” 물론 한국 뮤지컬 신의 대표 배우로서 갖는 감정도 컸다. “꼭 이 작품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뮤지컬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뻐할 일이에요.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하는 큰 사건이죠.” <어쩌면 해피엔딩>은 전미도를 통해 가장 많은 관객과 만났다. 지난 10년 동안 그도 클레어와 함께 성장했다. “처음에는 외우기에 급급했어요.(웃음) 그다음에는 클레어가 로봇이라는 사실에 집중했고, 이후 시즌에는 올리버와 클레어의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췄어요.” 10주년을 기념하며 10월 30일 개막하는 서울 공연에서는 “클레어가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전미도는 “이번 시즌 공연에선 다른 배우들이 더 잘해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까지도 제가 참여하는 게 맞을지 고민했어요. 그러다 “10주년을 잘 마무리해달라”는 박천휴 작가의 말에 마음을 정했죠. <어쩌면 해피엔딩>은 제가 참여한 작품 중 가장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으로 기억될 거예요.” 그의 바람대로 10주년 공연은 <어쩌면 해피엔딩>과 전미도의 해피 엔딩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 전미도의 클레어는 끊임없이 소환될 것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사랑의 수호자, 신성민

신성민은 가장 예리한 눈매를 가진 올리버다. 그러나 미소를 짓자 더없이 선한 인상이 드러난다. 캐릭터의 상징인 화분을 꼭 껴안은 사진 속 모습 그대로다. 신성민은 <어쩌면 해피엔딩>을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준 작품”으로 요약한다. “낯선 이와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올리버가 클레어를 만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죠. 그 후 슬프고 힘들더라도 계속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올리버의 성장을 지켜보며 저 또한 삶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됐어요.” 후반부에서 클레어와 함께 듀엣 넘버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를 부를 땐 여지없이 가슴이 요동친다.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라는 가사와 ‘그것만은 지워버려야만 해’라는 상반된 가사가 교차하는 부분에서 두 로봇의 엇갈리는 진심이 크게 와닿아요.” 2010년 <그리스>를 통해 뮤지컬에 입문한 신성민은 팬데믹 시기 <어쩌면 해피엔딩>과 맞닿았다. 당시 사연 멤버로 함께한 그의 주된 포부는 “막막한 삶에 작은 에너지를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사명감으로 그는 늘 무대에 올랐다. 이는 클레어를 향한 올리버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지난 공연에서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든든한 것은 이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10주년 공연에 모였다는 사실이죠.” ‘윌휴’ 작가가 함께 만든 또 다른 작품 <일 테노레>에 이어 다시 <어쩌면 해피엔딩>의 얼굴이 된 신성민이 사랑을 사수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2 섹시한 포즈를 취하는 클레어와 그런 클레어가 어색한 올리버. 둘의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청소부.

정휘가 입은 셔츠는 헌킴(Heon Kim), 체크 팬츠는 잉크(Eenk). 방민아의 그린 크롭트 재킷과 메리 제인 슈즈는 자라(Zara), 미니스커트는 프라다(Prada). 윌 애런슨의 스니커즈는 컨버스(Converse), 그린 비니는 파타고니아(Patagonia).

‘고맙다’는 말을 가장 잘하는 로봇, 정휘

정휘는 이날 화보 촬영장에서 가장 분주한 멤버였다. 누구보다 먼저 나와 다른 멤버를 기다리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막내가 빨리빨리 먼저 나와 있어야죠.” 2013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데뷔한 후 영화와 연극을 오갔던 그가 <어쩌면 해피엔딩> 10주년 공연에서는 막내다. 정휘만의 올리버가 가진 특징을 묻자, 막내다운 답이 돌아왔다. “젊은 패기죠!” 올리버는 부품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때까지 작동 중인 구형 로봇이다. 그럼에도 정휘의 올리버는 신형 로봇 못지않은 능력치를 보여줄 것이다.

“눈물이 없는 편”이라는 그에게 <어쩌면 해피엔딩>은 눈물샘을 자극하며 다가왔다. “대본과 음악이 너무 좋아요.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작품이에요.” 연습을 통해 처음 불러본 <어쩌면 해피엔딩>의 넘버 중 가장 크게 와닿은 곡은 ‘고맙다, 올리버’다. 극 중 올리버가 오랜 친구이자 주인이었던 제임스와 재회하는 순간을 상상하며 부르는 이 노래에는 그들이 서로 의지했던 추억이 담겨 있다. “너무 뭉클했어요. 누군가에게 형식적인 감사 인사가 아니라, 따뜻한 진심이 담긴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지, 또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감사를 전한 적이 있는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올리버와 제임스의 관계가 부럽고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려 했던 것 같아요.” 무대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디테일 또한 ‘진심’이다. “올리버는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는 순수하고 밝은 로봇이에요. 그런 감정이 조금씩 풍부해지는 올리버를 보여주고 싶어요.” 정휘의 올리버는 어떤 올리버보다도 ‘고맙다’는 말을 가장 잘하는 로봇이 될 것이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우리’를 위한 노래, 방민아

환한 웃음과 패기로 무장한 정휘 옆에서 커다란 시폰 리본으로 머리에 포인트를 준 방민아가 깜찍한 포즈를 취하자 신선한 활력이 불어온다. 이들은 육연에 다다른 <어쩌면 해피엔딩>의 ‘뉴캐’ 듀오. 올리버를 탐구하는 동안 메마른 눈물샘이 촉촉해진 정휘만큼 방민아 역시 클레어를 연기하며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했다. “클레어가 주인에게 배운 것은 ‘사랑은 나를 상처받게 하는 아픈 것’이라는 점이었어요. 그게 마음 아팠고,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싶었죠. 다행히 올리버와 함께하며 감정 변화를 겪게 되는데 문득 그렇게 성장하는 클레어가 어쩌면 저보다 더 인간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시에 클레어는 그에게 ‘완벽해야 한다’는 자기만의 강박에 갇혀 지냈던 과거를 상기하게 했다. 걸스데이 메인 보컬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후 영화 <최선의 삶>(2021)으로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받았을 때도 충분한 보람을 누리지 못했던 이유다. 터닝 포인트가 돼준 것은 뮤지컬이다. “늘 도망가고 싶었어요. 무대에 올라 평가받는 게 무서웠죠. 주변에 저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는데도요. 그렇게 <틱틱붐>(2024)을 하고 나서 많이 후회했고, 완전히 달라지자고 마음먹었어요. 이후 말부터 사고방식까지 전부 바꿨죠. 실패가 아닌 작은 성공에 집중하고, ‘한 번 더 해보자’ ‘넌 최선의 삶을 살고 있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어요.” <어쩌면 해피엔딩>은 꼭 필요한 타이밍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다. “클레어로서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을 부르는 순간이 가장 기대돼요. 인간적으로 가장 깊이 공감했던 곡이고, 그래서인지 관객에게도 닿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요.”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행복의 한가운데, 박천휴

“촬영 시안을 받아보고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어쩌면 해피엔딩>의 첫 내부 리딩 워크숍 때부터 함께했던 전미도 배우를 비롯해 이 작품의 지난 10년을 함께한 배우들, 그리고 13년간 저와 함께 이야기와 음악을 만들어오고 있는 윌 애런슨까지 다 모였다는 점에서요.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관찰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비친 모습 그대로 스포티한 차림에 에코 백을 가볍게 멘 채 가장 먼저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박천휴와 그의 창작 파트너 윌 애런슨이 이날 <보그> 촬영에서 받아 든 임무는 막중했다. 배우 9명이 앞다투어 등장하는 모든 신에서 청소부, 배송 기사 등의 카메오로 활약해야 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의상을 갈아입고, 따로 또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느라 이들은 촬영이 진행된 곳이자 10주년 기념 서울 공연의 무대가 될 두산아트센터에서 하루 종일 동분서주했다. “조력자 역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혼자만의 세계에 골몰하다가, 때론 출연진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촬영 내내 박천휴는 산뜻하면서도 여유롭게 촬영장을 활보했다. 이곳이 곧 그의 세계였으니까.

작가로서 여전히 스포트라이트 바깥에 머무는 쪽이 편하지만, 최근 박천휴는 스포트라이트 중심에 서 있다. 직접 극본과 가사를 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지난 6월 개최된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뮤지컬 부문 6관왕(작품상, 극본상, 음악상(작사·작곡상), 연출상, 남우주연상(대런 크리스), 무대 디자인상)을 수상한 덕분이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작품상과 극본상, 음악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러 방송과 잡지, 다양한 컨퍼런스와 대통령 간담회를 통해 그의 지난 삶은 물론 성향과 취향, 소신과 계획 등이 낱낱이 알려졌다. 덕분에 대중은 박천휴가 한국에서는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뉴욕에서 시각예술을 공부했으며 한때 K-팝 작사가로 활동했다는 사실과 그가 뉴욕대 재학 시절 만난 윌 애런슨과 함께 지난 13년간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2012), <어쩌면 해피엔딩>(2016), <일 테노레>(2023), <고스트 베이커리>(2024)를 차곡차곡 만들어왔다는 것, 그뿐 아니라 이언 매큐언을 사랑하는 엄청난 독서광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뿌듯하죠. 저를 통해 더 많은 분이 뮤지컬 작가, 극작가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고, 이 직업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으며,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직접 알릴 수 있게 됐으니까요.”

박천휴가 여러 인터뷰에서 강조했듯, 표준 계약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열악한 창작 환경에도 뉴욕에서 광고 회사를 다니며 <어쩌면 해피엔딩>을 쓰느라 골몰했던 시간은 충분히 행복했다. “‘이걸 쓰느라 생계가 힘들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작업했어요. <어쩌면 해피엔딩> 이전에 한국 뮤지컬계에서 저보다 먼저 작곡가로 활동하던 윌과 함께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데뷔작을 선보였지만, 우리만의 오리지널 이야기를 쓴 건 처음이었죠. 우리의 진정한 가능성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탐구한 시간이었고요.”

잘 알려진 대로, 사람과 거의 흡사한 ‘헬퍼봇’ 간의 사랑을 다룬 <어쩌면 해피엔딩>은 박천휴가 즐겨 가던 카페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음악 ‘Everyday Robots’에서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다. 언뜻 보기엔 공상 과학적 상상으로 가득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의 힘을 믿지 않는 클레어와 그럼에도 사랑하려는 올리버는 흔한 연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에 담긴 보편적인 정서는 이 작품이 K-콘텐츠의 열기와 무관하게 한국을 넘어 브로드웨이에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킨 비결로 꼽힌다. “<빽 투 더 퓨쳐>와 <블레이드 러너>처럼 정말 좋은 SF 작품은 미래에 대한 사실적인 상상 때문에 사랑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관객이 충분히 몰입했느냐가 중요한 거죠. <어쩌면 해피엔딩>은 다른 뮤지컬에 비해 지극히 소소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A boy meets a girl’이죠. 누구나 공감할 클래식한 사랑 이야기고요.” 작업 단계에서 박천휴와 윌 애런슨은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천착했다. 설득과 논쟁을 거듭하는 끈질긴 나날이 이어졌지만, 한층 너른 사랑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우리가 납득한 다음 세상에 뭔가를 내놓았을 땐 ‘세상 대 우리’가 되는 거잖아요. 치열하게 토론하는 과정에서 세상이 우리에게 던질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갖게 됐죠. 그 점이 정말 든든했어요.”

뼈대가 잡힌 뒤엔 매력적인 디테일이 추가됐다. 올리버가 재즈를 사랑하며 화분을 애지중지한다는 설정, 주인 제임스가 그에게 레코드판을 남겼다는 사실과 올리버와 클레어가 반딧불이가 수놓은 제주 풍경을 감상하는 장면 등은 ‘윌휴’의 아날로그적 취향과 감수성이 투영된 결과다. 두 사람의 솔직한 생각과 취향을 듬뿍 담아 완성한 작품인 만큼 10년 전, 대학로 첫 공연을 앞두고 윌 애런슨은 “무서웠고, 걱정됐다”고 터놓았다. 박천휴도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잠깐 암전이 된 순간, 관객 한 분이 크게 흐느끼셨어요. 윌과 서로 마주 보면서 ‘우리 이야기가 통하고 있는 것 같아!’라고 작게 쾌재를 외쳤죠.”

그 후 무서운 나비효과가 시작됐다. 100석이 채 안 되는 비영리단체의 극장에서 선보인 시범 공연 이후 무대는 계속 넓어졌고, 마침내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지난해에는 라이브 재즈 밴드를 아우르는 1,000석 규모의 공연으로 탈바꿈했다. 올리버 역할의 김재범, 신성민, 전성우, 정휘, 클레어 역할의 전미도, 최수진, 박지연, 박진주, 방민아 등 초연부터 함께한 배우들과 새로운 얼굴들이 총출동한 <어쩌면 해피엔딩> 10주년 기념 서울 공연 역시 620석의 너른 규모로 10월 30일 개막해 내년 1월 25일까지 관객을 마주한다. “10년 전에 보고 다시 보러 오신 관객뿐 아니라 높아진 기대치를 안고 공연장에 오실 새로운 관객, 그리고 저의 친척까지 모두 모인 자리일 거라는 게 부담스럽고 무섭기도 해요. 저는 자신감 넘치는 창작자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좋아해주는 분들에게 집중하자’는 생각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면을 보자’는 것은 <어쩌면 해피엔딩>을 둘러싼 갑작스러운 소요 속에서 요즘 박천휴가 자주 되새기는 마음이다. 최근 한국에 작업실을 마련한 그가 가장 먼저 공간에 들여놓은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일러스트 작품도 비슷한 포부를 잇는다. “심플한 토마토 그림이에요. ‘If you don’t like tomatoes you can fxxx off’라는 손 글씨가 적혀 있는.(웃음) 토마토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토마토를 좋아하게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나만의 토마토를 온전하고 싱싱한 상태로 내놓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텅 빈 무대를 생각하면 조여오는 심장이 책상 위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기분 좋게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걸어온 기분 좋은 여정을 되새기며 그는 새로운 작업실에서 <일 테노레> <고스트 베이커리>의 영어 버전과 뉴욕에서 살아가는 한국 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첫 단편영화 작업에 몰두하는 겨울을 보낼 계획이다. “안정적으로 잘 다닐 수 있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기로 했을 때, 그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나는 돈을 조금 벌거나 삶이 불안정하더라도 결국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고요. 그런 확신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 내놓은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관객도 다행히 많이 생겼고요. 그들과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이만큼 누적되었다는 사실도 기쁩니다.” 네모난 책상을 벗어나 동시대 한국을 즐거이 시간 여행 중인 박천휴가 다시 <보그>가 마련한 무대로 불려나간다. 그의 눈앞엔 그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처럼 기뻐하는 동료들이 있고, 그의 뒤에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윌이 남아 있다. 가장 확실한 행복이 이미 이곳에 있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믿기지 않는 행운, 윌 애런슨

윌 애런슨(Will Aronson)에게서는 궁극의 지혜를 터득한 너그러운 성인(聖人)의 분위기가 풍겼다. ‘휴’와 자신을 위해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손에 들고 등장한 그는 때때로 제작진 및 배우들과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는가 하면, <보그> 촬영에 대한 호기심 어린 질문을 내게 던지곤 했다. 박천휴와의 대화가 흐름을 타기 시작했을 때쯤엔 슬그머니 합류해 따뜻한 시선으로 동업자를 향한 무언의 응원을 건넸다. 박천휴에게 “윌의 의미”를 묻자 그가 “테라피스트”라고 막 답한 시점이었다. “가장 우울할 때도, 가장 신경질적일 때도, 기쁘거나 슬플 때도, 윌한테는 전부 다 얘기하거든요. 저의 모든 상처와 트라우마를 다 알아주는 사람이죠.”(박천휴) 윌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전혀 몰랐군요.” 하지만 선뜻 공감이 갔다. 날카롭고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예술가 친구를 포용하는 윌의 포근한 에너지가 이미 공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주무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세계에 당도하기까지 윌은 꽤 긴 방황기를 거쳐야 했다. 박천휴가 서울과 뉴욕을 넘나들며 문학과 음악, 광고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을 당시 또 다른 세상에서 윌은 재즈와 영화음악, 영화감독 일을 때에 따라 동경하며 갈팡질팡했다. 하버드에서 음악학을 공부하고 뉴욕대학교에서 뮤지컬 창작을 배우며 심지어 한국인이었던 대학원 동기의 주선으로 꾸준히 한국 뮤지컬 작품을 작곡하면서도 뮤지컬은 자신의 땅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뉴욕 링컨 센터에서 한동안 일했어요. 그때 어떤 분이 ‘그럼 뮤지컬 작가가 될 거야?’라고 물었을 때 ‘아뇨, 이건 그냥 취미고 나중엔 의대에 갈 거예요’라고 답한 기억이 나요. 열심히 뮤지컬을 만들고 있었으면서도 말이죠. 하지만 그걸로 성공해야겠다거나 브로드웨이로 진출하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순간 그에게서 이제까지와는 색다른 자아가 감지됐다. 예술을 사랑하면서도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타인의 인정에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연약한 예술가의 자아를 말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스스로를 속였던 것 같아요. 뮤지컬 작가로 일하고, 먹고살게 되면서 ‘그래, 나는 의사나 변호사가 될 운명은 아닌가 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돌이켜보면 늘 뭔가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말하는 것보다 음악이나 영상으로 소통할 때 훨씬 더 편안함을 느꼈고요.”

타고난 완벽주의 성향이야말로 긴 시간 자신의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마침내 뮤지컬의 세계에 안착했을 때 그는 어렸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두 가지 일화가 생각나요. 세 살 때 일이었어요. (이런 이야기까지 듣고 싶어 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버스 계단이 너무 높아 우물쭈물하던 저를 아버지가 안아서 계단 위로 올려주셨는데 ‘내가 할 거야!’라고 20분 내내 악을 쓰며 생난리를 쳤대요. 그 후 한동안 동네에서 ‘내가 할 거야’ 꼬마로 불렸죠. 또 한번은 알파벳 쓰는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말로는 1시간 반 정도 지나서 보니 제가 여전히 ‘A’만 쓰고 있었다는 거예요. 계속 ‘이것도 아니야’라고 하면서요.” 그랬던 윌이 달라지기로 결심한 것은 고등학생 무렵 가족이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영상 속 자신의 모습을 본 후였다. “이게 만약 영화라면 어떨까 상상해봤더니 ‘이런 등장인물은 진짜 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듣는 입장에서는 영화 같은 전개였다. 어쨌거나 기적적인 자기 객관화 시간을 거친 그는 이후 “잘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든 끝을 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거듭했다. “여전히 제 작업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해요. 하지만 어떤 길을 가더라도 그렇겠죠.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해나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정도로는 성숙해졌어요.”

목표를 현실화하고 현재에 집중하자 창의력에 추진력이 더해졌다. 그의 첫 한국 뮤지컬은 한국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2009). “이 작품을 위해 맨 처음 쓴 곡은 ‘김치냉장고 속에’라는 오프닝곡이었어요. ‘김치냉장고에 김치를 넣어, 김치만 넣지, 김치만두도···’라는 노래였죠.”(웃음) 자신이 만든 한국 노래를 한국 배우가 부르는 광경을 직관한 일은 <어쩌면 해피엔딩>의 브로드웨이 첫 공연을 감상할 때보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충무아트홀이었어요. 그때 느낌이 아직도 강렬합니다.” 공통 지인의 소개로 박천휴를 만난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둘은 2012년 초연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음악을 함께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뮤지컬로 인한 두 번째 전율은 그즈음 찾아왔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음악 연습을 시작하는 날, 배우들이 ‘그런가봐’를 노래하는데 저에겐 엄청난 선물로 느껴졌어요. 스무 명에 가까운 배우들이 목소리로 연습실을 가득 채우자 소름이 돋았죠.” 자신이 그랬듯 이 이야기에 아낌없는 진심을 할애하는 반가운 동반자를 마주했던 그 순간으로 윌의 눈빛이 잔잔히 빨려 들어갔다.

“저 혼자 하는 것은 없어요. 대본, 가사, 노래, 연주, 연기, 뭐든 혼자라면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오지 못할 거예요.” 혼자만의 창작에 집중할 때와 함께 일할 때의 마음가짐이 다른지 묻자 윌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윌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박천휴와 윌 애런슨은 평소 좋아하는 예술을 공유하며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받는 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눈 이야기는 창작의 불씨가 된다. “우리 둘의 가슴이 뛰는지가 가장 중요해요.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먹힐까?’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죠. 어떤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쩌면 해피엔딩>은 로봇이 주인공이지만 보면 볼수록 우리 인생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거기서 관객은 따뜻함을 느끼죠. <고스트 베이커리>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60년대 말에 서양식 베이킹이 자리 잡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들은 언제나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제강점기에 오페라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조명한 <일 테노레>도 마찬가지예요. 먼저 우리 가슴을 뛰게 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새로움을 느끼게 할 수 있어요.” 창작 과정에서 윌이 “여기서 망설이는 이유는 뭐예요?”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까요?”라고 물으며 박천휴를 채근하는 데는 그런 진심이 깃들어 있다.

박천휴라는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 다음으로 찾아온 행운은 실력파 배우들을 마주한 일이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아요. 이들 덕분에 지금껏 벌어진 모든 일을 경험하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엔딩’은 아니다. 윌에게는 더 크고 확실한 꿈이 있다. “우리 데뷔작 <번지점프를 하다>를 아마추어 학생들이 상연했을 때, 그 후로도 직장인 동호회 같은 여러 비전문가 집단에서 각자의 개성과 해석을 더해 이 작품을 재생산하는 것을 봤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우리가 만든 이야기가 극장이나 음악회에서는 물론, 다양한 분야와 계층을 관통해 퍼져나가는 광경을 보는 것이 저의 꾸준한 소망이에요. <어쩌면 해피엔딩>이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그런 반향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사랑받는 ‘클래식’이 되길 바랍니다.” 윌은 이 모든 이야기의 반을 한국어로 건넸다. 그의 진심이 닿지 못할 세계는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3 사람처럼 반신욕을 해보고 싶은 클레어. 욕조에 있는 클레어를 발견하고 당황한 두 작가.

윌 애런슨의 스트라이프 수트는 김서룡(Kimseoryong), 셔츠는 아모멘토(Amomento), 슈즈는 프라다(Prada), 캠프 캡은 디키즈(Dickies). 박천휴의 재킷과 와이드 팬츠, 슈즈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셔츠는 헌킴(Heon Kim). 박진주가 입은 퍼프 슬리브 스웨터는 앤아더스토리즈(&amp; Other Stories), 레이어드한 리본 모티브의 미니 드레스는 자라(Zara).

끝을 알고도 사랑하려는 마음, 박진주

박진주에게 클레어와의 만남은 지난해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당시 그는 클레어에 대해 “낯설지만 나와 닮은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불완전하고 서툴지만 결국 사랑을 믿고 싶은 마음, 그 모습이 제 안에도 있었어요. 클레어를 연기하는 건 제 안의 한 부분을 무대 위로 꺼내 보여주는 것 같았죠. 그렇게 클레어의 모든 순간은 그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을 통해 가창력을 뽐내고, <놀면 뭐하니?>로 예능감을 드러낸 그이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의 무대에서는 밀도 높은 감정을 보여줄 계획이다.

박진주가 바라보는 클레어의 핵심은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랑에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언젠가 끝이 있기 때문이다. 박진주는 그것이 <어쩌면 해피엔딩>의 가장 큰 감동 포인트라고 말한다. “한 영화감독님께서 공연을 보시고 본인의 유한한 시간을 강하게 느껴 눈물이 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순간이 저에게 크게 와닿았어요.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의미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끝에 대한 성찰로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흥미로웠죠.” 최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부를 때 마음이 크게 움직인 이유도 같다. “’우리가 멈추는 순간까지 사랑하자’는 내용인데, 사랑을 다짐하는 순간에는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그런 용기가 떠오르기 때문에 더 와닿는 것 같아요. 끝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하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기도 하고요.” 박진주의 공감은 그의 클레어를 더 사람에 가까운 온도로 만들 것이다. 뜨겁지 않아도, 결코 차가울 수 없는 로봇이라고 할까.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4 수리가 완료된 올리버를 박스에서 조심스럽게 꺼내는 배송 기사와 제대로 수리된 건지 여전히 의심스러운 클레어.

최수진의 터틀넥 니트는 막스마라(Max Mara), 펌프스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김재범의 베스트와 팬츠는 헌킴(Heon Kim), 로퍼는 제냐(Zegna). 윌 애런슨과 박천휴의 워크 셔츠와 워크 팬츠, 캠프 캡은 디키즈(Dickies), 스니커즈는 컨버스(Converse).

처음처럼 아름답게, 최수진

최수진은 <어쩌면 해피엔딩>의 2016년 초연에 참여한 배우다. 그는 그때를 “정신없이 바빴던 시기”로 기억한다. 앞서 캐스팅된 배우가 건강 문제로 하차하면서 중간에 투입된 그에게 주어진 준비 기간은 단 2주. 노래, 대사, 동선을 외우는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부담이 컸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에 누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그만큼 최수진에게 <어쩌면 해피엔딩>은 “힘들게 시작했기에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다시없을 도전이었고,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었어요. 앞으로도 이런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어요.”

2009년 <살인마 잭>으로 데뷔한 후 그는 매년 무대에 올랐다. 올해만 해도 <라흐 헤스트> <올랜도 in 버지니아>에 이어 <어쩌면 해피엔딩> 10주년 공연이 세 번째다. 다시 만난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그는 소소한 변화를 발견했다. “작품의 감동과 메시지는 같지만, 시간이 흘러 장면마다 발전한 부분이 느껴져요.” 그럼에도 클레어를 연기하며 놓치지 않으려는 핵심은 같다. “클레어는 로봇이지만 인간의 감정을 배운 존재예요.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해요.

특히 올리버에 대한 마음이 변해가는 과정을 어색하지 않게 표현하고 싶어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넘버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부르는 대목에서도 그런 감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너와 나 잡은 손 자꾸만 낡아가고 시간과 함께 모두 저물어간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 해.’ 이 가사는 그 자체로 성스럽고 아름다워요. 그럼에도 사랑으로 나아가는 건 언제나 위대하죠.” 최수진의 클레어는 10년 전보다 더 단단한 사랑을 품은 로봇으로 무대에 오를 것이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전파하고 싶은 마음, 김재범

올리버가 지닌 순수함을 사랑하는 김재범이 처음 뮤지컬 무대에 섰을 때의 순수한 열정을 되새기며 <어쩌면 해피엔딩> 10주년 기념 공연에 기쁘게 합승한다. “한국 창작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서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뿌듯하고 행복하더라고요. 작품 인기만큼 예전보다 무대도 훨씬 커졌는데, 기념비적 순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연기하려 합니다.” 초연, 앙코르, 재연에 이어 이번 서울 공연까지, <어쩌면 해피엔딩>과 벌써 네 번째 인연을 되새기게 된 ‘대장 올리버’ 김재범의 열의는 어느 때보다 충만한 상태다. ‘고장 난 로봇’을 연기해달라는 <보그>의 요청을 거뜬하게 수행한 그가 원년 멤버의 여유를 과시한다. 100분간의 공연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이지만 200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한 후 20년 넘게 뮤지컬, 연극, 영화, 드라마에서 활약하며 갈고닦은 연기력과 위트가 뿜어나왔다. “사실 처음엔 뮤지컬의 매력을 잘 몰랐고, 그냥 친구들이 하니까 재미있어 보여서 단순하게 도전한 것이었어요. 그게 어느새 20년도 더 된 일이군요.(웃음) 그러다 보니 많은 면에서 부족했고,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어요.” 이제껏 음악과 이야기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마법 같은 순간을 기대하며 무대에 올랐던 그가 최근 마음속에 한 가지 소망을 더 지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정말 ‘착한’ 작품이에요.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됐고, 올리버를 연기하며 앞으로 더 착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죠. 여러분도 이 작품을 통해 더 나은 ‘나’를 그리길 바랍니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5 어딘가 고장 나 보이는 클레어와 올리버. 석연찮은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는 작가.

박지연이 입은 니트 드레스와 코트는 펜디(Fendi), 웨지 뮬은 페라가모(Ferragamo). 전성우의 셔츠, 팬츠, 타이는 펜디, 로퍼는 프라다(Prada). 박천휴가 입은 셔츠와 팬츠는 돌체앤가바나(Dolce&amp;Gabbana).

지금 이 순간의 클레어, 박지연

2018년 박지연에게 <어쩌면 해피엔딩>은 도전이었다. 소극장 공연의 문을 두드리던 그에게 문을 열어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연은 다시 만난 <어쩌면 해피엔딩>을 통해 “내가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작품 성격이나 클레어라는 캐릭터가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은 없어요. 다만, 저는 여전히 올리버 같은 마음을 가졌지만 클레어처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말하기엔 너무 일기장 같은 느낌이라 부끄럽군요.”(웃음)

2018년 이후 그는 <시라노> <레베카> <드라큘라> <고스트 베이커리> 등 여러 뮤지컬에 참여하며 매년 무대에 올랐다. 동시에 <비밀의 숲 2> <붉은 단심> <지배종> 등의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됐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박지연이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던 작품이었다. “이제야 제 마음이 이 작품을 다시 표현할 준비가 된 것 같았어요. 설레고, 긴장되고, 두렵고, 기대되고, 재밌고··· 모든 감정이 뒤섞인 기분이에요.” 초연 당시 가장 좋아했던 넘버도 다시 부를 수 있게 됐다. “‘Goodbye, My Room’과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를 좋아해요.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 쌓아온 사랑과 추억을 떠올릴 때 위로를 받거든요. 이 노래를 부르면, 그 안에 제가 들어가 노래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고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위로를 바라는 건 아니다. “저는 언제나 제 삶에서 지금 함께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가장 중요해요. <어쩌면 해피엔딩>이 제게 갖는 의미는 공연이 끝나고 시간이 더 흘러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즐겁게 공연을 마치고 싶어요.” 박지연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공연의 해피 엔딩이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뜨거운 것이 좋아, 전성우

<어쩌면 해피엔딩>의 재연과 삼연 공연에 함께한 전성우는 공연을 또 한 번 앞두고 고민에 휩싸였다. 순수성이 강한 캐릭터인 올리버에 실제 삶의 경험치가 은근슬쩍 배어든 탓이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해피엔딩> 무대에 섰던 것이 벌써 5년 전이더라고요. 그 사이 저라는 사람도 인간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성숙해졌기 때문에 뭐든 너무 능숙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경험에 대한 반응이 변함없이 순수한 올리버로 돌아가려 했죠.” 그의 데뷔는 뮤지컬(<화성에서 꿈꾸다>)이지만, 2015년 <육룡이 나르샤>로 데뷔한 후 최근 몇 년간은 드라마에서 활약이 두드러졌다. 올해만 해도 <백번의 추억> <얄미운 사랑> 등에 참여했다. 그러는 틈에도 ‘윌휴’ 작가의 최신작 <고스트 베이커리>를 비롯해 <어쩌면 해피엔딩> 10주년 공연에도 힘을 보탠 전성우의 뮤지컬에 대한 사랑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뮤지컬은 중간에 끊을 수도, 다시 할 수도 없잖아요. 그게 너무 좋아요. 무대에서 상대 배우와 관객의 호흡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는 점도요. 무사히 공연을 마친 뒤 관객이 보내는 뜨거운 박수갈채를 통해 받게 되는 위로의 힘도 대단하죠. 다른 장르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뮤지컬만의 매력이에요.” 온갖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쌓인 복합적인 체취를 걷어내고 가장 순수한 마음과 정신으로 무장한 전성우가 새로운 호흡을 가다듬는다. “최고의 매력과 기량을 보여준 작품도 좋지만, 저는 결국 <어쩌면 해피엔딩>을 ‘심장을 뜨겁게 만들어준 작품’으로 추억하고 싶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진짜 ‘쇼’가 시작된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