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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 따라 쓰게 요시하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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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 컷.

전 세계 평단과 관객이 동시대 일본 영화에 기대를 거는 배경에는 상당 부분 미야케 쇼가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꾸밈 없이도 충만하고 소박한 인물과 세계가 얼마나 비범하게 그곳에서 살아가는지를 수긍하게 된다. 그가 그리는 세상 속 인물들이 뿜는 열기, 땀, 숨, 그곳의 공기와 바람, 그 모든 게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진동 등이 일상이라는 이름에 생기와 윤기와 운동성을 부여한다.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저마다 버티고 서서 만들어낸 소우주가 딱 마침맞게 작동하는 세계. 거창하거나 으스대는 법 없이, 진중하지만, 유머를 잃는 법 없는 미야케 쇼라는 멋진 신세계. 그런 감독의 기질과 재능이 신작 <여행과 나날>(2025)에서 한층 우아하고 유려하게 펼쳐진다. 과감하고 역동적인 자연으로 떠나는 여행과 정적인 내면의 여정이 따로 또 함께 있는 정동의 길이다. 마치 영화 시(詩)랄까. 꿈결 같은 여행기랄까. 무엇이라 부르든 미야케 쇼는 또 한 번 성큼 한 걸음 도약했다.

<여행과 나날>은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1967), <눈집의 벤 씨>(1968)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미야케 쇼가 영향받았다고 하니, 이 좋은 영화의 원작이라고 하니, 냉큼 펼쳐 볼 수밖에. 쓰게 요시하루, 그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1937년 도쿄 태생, 도금 공장에서 일하다가 1954년 만화가로 데뷔, 1960~70년대 만화 잡지 <월간만화 가로>에 그의 명성을 드높일 놀라운 작품을 연재, 1987년 <이별>을 발표한 후 신작을 내놓지 않음, 2020년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만화가에게 헌정하는 공로상 수상. 대중적인 작가는 아니지만 만화 작가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예술가나 연구자들 사이에서 쓰게 고유의 만화는 오래전부터 익히 알려진 듯하다. 다행히도 ‘쓰게 요시하루 만화집·작가 연구’라는 부제가 달린 <나사와 검은 물>(타이그레스 온 페이퍼, 2022)이 이 여정의 길라잡이가 돼주기에 충분했다.

쓰게 요시하루, 야마시타 유지 '나사와 검은 물'(타이그레스 온 페이퍼, 2022).

책의 형식과 구성부터 흥미롭다. 이 책은 앞뒤 없이 양쪽이 모두 표지가 되고 어느 쪽에서 시작해도 상관없으며 중간 지점에서 만난다. 일본 책처럼 흔히 말하는 책의 뒷면에서 시작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면 일본식 세로쓰기로 이루어진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네 편 <나사식>(1968), <바깥의 팽창>(1968), <붉은 꽃>(1967), <겐센칸 주인>(1968)이 차례로 나온다. 반대로, 통상 말하는 책의 앞면에서 시작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면, 옮긴이가 일러주는 ‘나사와 검은 물, 쓰게 요시하루를 읽는 몇 가지 말’, 쓰게 요시하루와 일본 미술평론가 야마시타 유지의 대화를 옮긴 ‘꿈, 리얼리즘, 무의미를 찾아서’, 야마시타 유지가 쓴 작가 모노그래프 ‘미술평론가의 쓰게 요시하루 입문’, 만화 연보, 만화 연대기, 화보가 이어진다. 그리고 쓰게 요시하루의 독자이자 작가인 두 사람이 쓰게의 만화 속 장소에 관한 각자의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에 대해 쓴 에세이를 전한다. 그러니까 쓰게의 만화를 직접 읽고, 쓰게의 작가 세계에 대한 일종의 해석과 해설, 구체적인 만화 자료가 한 권 안에 다 있는 셈이다.

쓰게 입문자인 나로서는 그의 만화부터 보는 게 당연하다. 쓰게의 세계관, 쓰게의 시선, 쓰게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그의 감각과 미감까지도. 마치 현실 속에서 꿈꾸는 듯하달까. 꿈속에서 현실의 출구를 찾는 듯하달까.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듯하다가도 바로 다음 컷에서 땅이 사라지는 듯 아스라하고 이상한 세계다.

‘꿈은 누구라도 경험하는 것처럼 강렬한 현실감,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을 고집해왔는데 그런 이유로 꿈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서부터 자연스럽게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 풍의 <나사식>이 탄생하였습니다. (…) 스스로 창작의 기조는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얼리즘은 현실의 사실에 이상, 환상, 주관 등을 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으로 거기에 무슨 의미를 추구하는 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란 해석이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단지 그대로 현전하고 있을 뿐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의미가 없다는 건 사물이 연관성을 잃고, 모든 것은 맥락이 없어져 파편화되고, 시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바야흐로 꿈의 세계입니다.’(23~25쪽)

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 컷.
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 컷.

<해변의 서경>, <눈집의 벤 씨>가 전체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도판의 일부와 그에 관한 짧지만 귀한 언급들, 무엇보다 전체 작가 세계를 들여다보면 짐작 가는 구석이 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혹은 극도의 부감과 앙각 쇼트로 그린 바닷가 절벽, 파도, 바람, 눈(雪)을 그리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쓸쓸하고 생경한 감각이 있다. 쓰게가 뒤늦게 여행에 관심을 기울여 낡은 온천 마을을 찾아갔다는 일화, 250대의 수동 카메라를 수집해온 이력, 여행지를 찍어둔 사진 등에 대한 일화도 이 작가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쓰게의 만화풍, 세계관, 삶의 이력이 미야케 쇼의 <여행과 나날>에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크고 작게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작가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연결 지점을 발견하고 연결의 가능성을 자기 식으로 추측하는 것은 독자이자 관객의 자리에서 누리는 크나큰 즐거움이다. 미야케 쇼는 쓰게 세계의 서경, 정서, 시선을 큰 줄기로 삼되, 영화란 결국 멈춰 있던 것이 움직이는 순간에 뭔가가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유머 또한 물론이다.

  • 쓰게 요시하루, 야마시타 유지나사와 검은 물

    (타이그레스 온 페이퍼,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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