뎀나가 만든 구찌의 새로운 가족사진
유서 깊은 이탈리아 하우스의 새로운 가족사진.
기다림은 끝났다. 마침내 뎀나(Demna)의 새로운 구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2026 봄/여름 밀라노 패션 위크 첫날인 9월 23일 저녁에 예정된 단편영화 <더 타이거> 시사회가 시작되기 36시간 전 룩북 형태로 깜짝 공개한 것. 출발을 알리는 방식마저 혼돈에 대한 그의 욕구를 대변했다.
데미 무어를 비롯해 에드워드 노튼, 엘리엇 페이지 등 영화 속 인물 모두가 착용한 ‘라 파밀리아(La Famiglia, 가족)’ 컬렉션은 뎀나가 정의한 구찌 하우스 문법에 대한 첫 입문서다.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순수예술 사진가 캐서린 오피(Catherine Opie)가 촬영한 인물 사진 37장은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의 관점으로 본 ‘구찌의 구찌다움(Gucciness of Gucci)’이었다. 인물마다 이름도 붙였다. 인생을 즐겁게 보내는 데 몰두하는 ‘미스 아페리티보(Miss Aperitivo)’는 은색 시퀸 미니 드레스를 입었고, ‘라 브이아이시(La V.I.C.)’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GG 모노그램으로 치장했으며, 셔츠 단추를 벨트 버클 부분까지 풀어 헤친 채 등장한 ‘나르시시스타(Narcisista)’를 보면 톰 포드 시절이 떠오른다. 이 특별한 ‘가족 앨범’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확립된 하우스 코드에 대한 뎀나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오피의 첫 번째 사진 ‘라르케티포(L’Archetipo, 원형)’는 새로 제작된 모노그램 트렁크를 보여준다.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근무한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1921년 피렌체로 돌아와 까다로운 상류층을 위한 고급 여행 가방 제조업체를 설립한 시기와 하우스의 초기 성공을 상징하는 제품이다. 뎀나는 그다음 이미지부터 창립자가 시작한 이야기에 자신의 페이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모델 마리아카를라 보스코노가 착용한 ‘인카차타(Incazzata, 분노한 여자)’ 룩이다. 머리에 꽃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1960년대풍 진홍색 미디 코트와 장갑, 홀스빗 장식 구두, 그리고 고전적인 뱀부 백으로 단장한 그녀는 분노보다는 우아함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구찌 코드와 뎀나의 캐릭터 연구 사이의 충돌은 계속 이어진다. 가장 현대적인 캐릭터는 소셜 미디어 시대의 패션 애호가를 대표하는 ‘린플루엔세르(L’Influencer)’. 도마뱀 질감의 오버사이즈 가죽 봄버 재킷과 미니스커트에 구찌 스트라이프 니트를 조합하고, 홀스빗 장식 슬라이드 펌프스와 얼굴 전체를 덮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다. 니트 셔츠 칼라 아래 빨간색 리본을 묶은 남성 룩 ‘너드(Nerd)’는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의 초기 구찌 디자인을 정확히 참조하고 있다. 반면 전신을 덮는 황금빛 메탈릭 가운을 입은 ‘라 메체나테(La Mecenate, 후원자를 뜻하는 동시에 구찌 밀라노 본사의 주소를 암시한다)’와 허리선이 강조된 플로라 프린트 가운 차림의 ‘라 콘테사(La Contessa, 백작 부인)’는 이탈리아풍 우아함을 발산하는 대표적인 룩이다.
“구찌에는 2개의 영혼이 있습니다. 유산과 패션성이죠. 그저 단순히 창의성을 주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품이 구찌의 위상을 대변해야 합니다.” 얼마 전 구찌 CEO로 임명된 프란체스카 벨레티니(Francesca Bellettini)는 뎀나의 구찌 합류를 발표한 지난 3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컬렉션은 확실히 구찌처럼 보인다. 오피의 렌즈 역시 뎀나의 파괴적이고 불손한 세계관에 맞춰 정밀하게 조정되어 있었다. 이제 주체인 구찌와 객체인 뎀나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 첫 징후는 이번 컬렉션을 가장 먼저 판매한 9월 마지막 주 전 세계 10개 매장에서 가늠할 수 있었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