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의 미학, 시모네 벨로티의 질 샌더
일상에서 입고 싶은 가장 시적인 옷.
질 샌더 쇼가 8년 만에 밀라노 카스텔로 광장으로 돌아왔다. 스포르체스코성을 마주한 질 샌더 본사에서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모네 벨로티(Simone Bellotti)의 첫 번째 질 샌더 쇼가 열린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발리(Bally)에서 퇴사한 시모네 벨로티는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지난 3월부터 질 샌더로 출근했다. 발리에서 네 시즌을 보내는 동안 그는 패션계에서 사랑받는 디자이너로 꼽혔고, 그가 합류하면서 오랫동안 질 샌더에서 사라진 설렘을 다시 불러왔다.
그러나 질 샌더에서 그의 역할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과제였다. 발리에는 기성복에 대해서만큼은 계승해야 할 전통이 없었지만, 질 샌더는 다르다. “정말, 그녀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어요. 우리 모두에게요.” 벨로티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질 샌더의 유산은 지금까지 온라인에서 회자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네비어 반 시누스(Guinevere Van Seenus)와 안젤라 린드발(Angela Lindvall)이 등장하는 질 샌더의 1990년대 후반 광고 이미지가 트렌드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번 쇼 런웨이의 첫 번째 모델도 반 시누스였다. 백스테이지에서 벨로티는 질 샌더 특유의 절제된 품격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구조와 테일러링, 클래식함과 동시대성 그리고 가벼움 사이의 균형을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몸을 은근하게 드러내되 노골적이지 않게요. 질 샌더는 늘 이 두 요소의 공존을 고민하는 브랜드죠.”
벨로티는 기초를 다지면서 아이코닉한 질 샌더의 더블 페이스 코트를 극도로 얇은 가죽으로 재현했다(장인 정신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아주 가까이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테일러링에는 세련된 위트를 더했다. 바지의 골반 부분을 좁고 길게 잘라내거나 재킷 뒷면을 깊이 파서 피부를 드러내는 식이었다. 그런가 하면 구조적이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게 풀어낸 피스도 있었다. 올이 풀린 실크를 층층이 쌓아 장식한 시프트 드레스, 대비되는 컬러로 여러 겹 레이어드한 아주 얇고 섬세한 니트 드레스 등이 런웨이에 등장했다.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의 ‘후즈(Hoods)’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반 시누스의 흰색 A 라인 스커트는 다트의 접힌 부분이 밖을 향하도록 재단해 미묘한 기하학적 볼륨을 만들어냈다. 벨로티는 이 디테일을 ‘현대적인 갑옷(Modern Armature)’이라 표현했다. 또 다른 스커트는 사선으로 잘려나가기도 했는데, 루치오 폰타나의 팬이라면 알아볼 만한 모티브였다. 어떤 드레스는 복부가 둥근 창처럼 뚫려 있어, 안쪽으로 갑옷의 쇠사슬처럼 비즈를 장식한 브라가 은근히 드러났다. ‘신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꼭 ‘속살을 노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이런 직접적인 방식은 오리지널 질 샌더의 감성과는 거리감이 있다. 그래서 벨로티는 서로 다른 농도와 형태의 니트를 다양하게 활용해 새로운 균형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 옷처럼 작게 줄어든 스웨터를 슬림한 스키 니트 위에 겹쳐 입고, 여기에 청바지를 매치했다. 이것 역시 과거 질 샌더가 런웨이에 데님을 선보인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지만 그녀가 무대를 떠난 지 이미 12년이 흘렀고, 그 사이 스타일은 달라졌다. 그리고 벨로티는 현실감 있는 디자인으로 이미 큰 성공을 거둔 적 있으니 말이다. 그런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번 컬렉션의 슈즈도 주목할 만하다. 앞코에 ‘아마추어(Armature)’ 디테일, 그러니까 각을 연출한 반짝이는 옥스퍼드 슈즈, 비대칭 라인의 발레 플랫, 곡선형 굽이 돋보이는 펌프스 등은 모두 독창적이면서도 일상적이었다. 벨로티의 첫 번째 질 샌더 쇼를 요약하면 구조와 유연함, 전통과 현대, 노출과 절제의 공존을 세련되게 조율한 한 편의 선언문이자 ‘균형의 미학’이라 표현할 수 있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