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더라도 브랜드는 계속 살아남도록” – 잉크의 이혜미
세계가 한국 패션을 탐닉하는 건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한국 패션을 정의하는 6팀의 디자이너는 현재에 충실한 채 눈앞에 놓인 트랙을 달린다.
한 달 동안 이어질 해외 출장을 앞둔 이혜미는 편도선이 부어 핼쑥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봄/여름 컬렉션도 아직 해야 할 게 많은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 걱정이에요.” 하지만 그 덕에 사진 속 얼굴선은 한층 날렵하고 아름답다. 모니터를 본 그녀가 키득대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은 점도 있군요!” 모델들이 입은 가을/겨울 컬렉션은 잉크가 이어온 알파벳 여정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베이지와 블랙 두 컬러로 제한한 의상은 블랙홀처럼 빛을 흡수하는 벨벳, 값비싼 상아처럼 고상하게 빛나는 새틴, 하일랜드의 양 떼처럼 곱슬거리는 모피 등 다채로운 텍스처로 풍성하다. 하지만 다음 시즌엔 최소한 다섯 가지 컬러가 등장한다. “아티스트 니나 콜치츠카이아(Nina Koltchitskaia)의 최근 작업에서 동양의 산수화를 떠올렸어요. 한국의 오방색을 활용한 작품을 부탁해 컬렉션의 메인 프린트로 활용했죠.” 잉크는 2024 봄/여름 시즌부터 한국적인 요소를 컬렉션에 가미해왔다. 대단한 애국심의 발로나 역사를 파고드는 민족주의 같은 건 아니다. 해외 경험 없이 한국에서 공부하고, 국내 패션 회사에서 경력을 쌓아 브랜드를 론칭한 자신의 이야기의 일부다. “해외 패션 위크의 수많은 브랜드와 차별화하면서 패션계에 영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다시 알파벳 A로 돌아가는 다음 컬렉션 ‘A for Aesthetics’를 준비하면서 그 요소를 좀 더 발전시켰죠.” 파리 패션 위크 데뷔를 기점으로, 잉크는 글로벌 컨템퍼러리 디자이너 브랜드로 빠르게 입지를 다지고 있다. CD 겸 CEO인 이혜미는 더 바빠졌고 생각도 많아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투자와 매각 제안은 잉크가 지나온 과거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의 기준에서 대부분 탈락했다. 액세서리로 시작해 토털 컬렉션을 선보인 후 파리 진출까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꾸준히 탈피하고 변태하며 성장해온 과거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잉크의 현재에만 관심이 있다면, 과연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당장 영업이익과 매출 증가가 중요하다면 메종 잉크도, 파리 쇼도 쓸데없는 짓이니까요. 장기적인 계획을 가져가고 싶어요. 내가 없더라도 잉크라는 브랜드는 계속 살아남도록 말입니다.” 그녀가 사업적 제안에 열려 있는 이유는 탄탄한 조직이 되어 더 많은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혼자 힘겹게 끌고 가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올해 들어 팀원들에게 믿고 맡기는 부분이 많아졌습니다. 실제로 팀원 각자가 상당히 많은 양의 업무를 소화하고 있고, 계속 버텨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죠.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팀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