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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 노화 유행이 내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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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된 수명만큼 병든 채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공포감. 도파민을 좇던 젊은 세대는 이제 노화 속도 제어에 나섰다.

화이트 셔츠 드레스는 질 샌더(Jil Sander), 실버 귀고리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노화는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다.’ 책의 소제목을 확인한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다. 더는 뒤에 나오는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받은 충격을 나누고자 즉시 지인들에게 그 글귀를 찍은 사진을 보내니 돌아온 답은 대부분 하나였다. “망했다.” 적정하게, 때로는 과하게 즐겼던 음주와 누워서 유튜브를 보며 한없이 늦어지던 취침 시간, 허다하게 중도 포기한 운동과 불규칙한 식습관으로 점철된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연 내 생체 나이는 실제 나이와 엇비슷하긴 할까?

“영국 의학 저널 <랜싯(Lancet)>의 최근 논문은 한국인에 대한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운동량은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꼴찌, 자극적이고 매운맛을 즐기는 식습관, 심각한 디지털 미디어 중독과 높은 스트레스 지수, 우울감 호소 비율도 전 세계 1위이며 수면량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죠.”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며 대한민국을 ‘가속 사회’ ‘가속 노화를 조장하는 사회’라고 표현한다. ‘불닭볶음면’과 ‘먹방’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마라탕과 탕후루, 쇼츠, 눈에 보이는 근육을 위해 단식까지 거행하는 ‘바디 프로필’ 촬영 등 실로 유행하는 것들을 되짚어보면 납득이 간다. 요점은 이런 생활 습관으로 인해 우리가 부모 세대보다 빠르게 늙고 있다는 것이다. 몇십 년 후면 노쇠해질 우리 엄마가 나의 병시중을 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머릿속에 떠오른 끔찍한 그림을 떨쳐내고 건강 도서와 노트북으로 자료 조사에 나섰다.

먼저 속도를 판단하기에 앞서, 탄력이 떨어지고 쭈글쭈글한 주름이 생겨나는 것이 피부 노화의 척도라면 생물학적으로 ‘노화’와 ‘노인’이 어떻게 정의되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노인이란 노화로 인해 몸이 고장 나고, 신체가 굴러가는 방식에 변화가 나타난 인간을 뜻한다. 여기에 고혈압, 당뇨병 같은 질병의 유무, 걷는 속도를 포함한 신체 기능, 인지 기능, 우울감 유무 등 건강 상태를 알 수 있는 요소를 측정하며 몸의 고장 정도를 계산해 ‘노쇠 지수’를 매긴다. 의학계는 숫자 나이보다 이 노쇠의 정도를 중요시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건강한 노화를 위해 사람이 가진 고유 성능의 총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동성, 인지, 정신적 안녕, 활력, 감각기-시청각, 사회와 물리적 환경 등이 ‘내재 역량’이라는 영역을 구성하는데, 고장 난 부분이 노쇠 지수라면 고장 나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 ‘내재 역량’이다.

정희원 교수의 저서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에서는 이런 숫자 나이와 생물학적 노화의 괴리가 점점 다양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꾸준히 내재 역량을 관리해온 사람은 90세에 가깝다 해도 젊은 성인과 비슷한 삶을 누린다는 것이다. 쾌락 위주의 생활 패턴은 이런 내재 역량을 감소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길어진 수명에서 젊고 건강한 상태를 누릴 수 있는 기간은 오히려 점차 짧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노화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바로 ‘저속 노화’의 핵심이다.

유튜브 채널이 새빨갛고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자극적 쇼츠로 뒤덮여 있다면 최근 트위터와 틱톡은 반대 행보를 보인다. 사람들은 ‘저속 노화 식단’이라 불리는 소박한 한 끼를 공유한다. 삶은 달걀, 양배추와 두유로 구성한 아침, 렌틸콩과 귀리, 현미, 백미를 4:2:2:2 비율로 성인의 하루 단백질과 섬유질 권장량을 충족하는 일명 ‘저속 노화 밥’까지. 이 유행에는 정희원 교수의 활발한 SNS 활동이 큰 몫을 했다. 트위터상에서 누구든 저속 노화와 관련된 글을 올리면 찾아가 리트윗을 하는 바람에 ‘저속노화 말벌아저씨’라는 별명까지 생긴 그로 인해 웰니스 트렌드가 하나의 ‘밈’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4년 전보다 20대와 30대 당뇨병 환자가 각각 47%, 25.5% 증가했다. 식후 급격히 혈당이 치솟다, 인슐린이 분비된 후 혈당이 급격히 떨어지며 졸음이 심하게 오고, 머리에 안개 낀 느낌을 받는 등 혈당 스파이크로 고통받는 젊은 세대에게 이 열풍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국내에 저속 노화가 있는가 하면 해외에서 주목하는 키워드는 바로 ‘만성 염증(Inflammaging)’. 2000년 클라우디오 프란체스키(Claudio Franceschi) 교수가 처음 제시한 이 용어는 만성 염증이 노화를 가속화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틱톡에서는 해당 단어의 해시태그 조회 수가 100만 회에 이르고, ‘젠지’는 식이요법과 피부 관리법, 영양제를 서로 공유하며 체내 염증 반응을 줄일 수 있는 노하우를 전한다. 저속 노화와 결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국한된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단순당이나 정제 곡물 위주의 식단이 인슐린 대량 분비로 이어지며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키고, 이것이 반복되면 복부 지방, 지방간, 근육 내 지방이 쌓이며 만성 염증을 만든다. 이런 루프 현상으로 노화를 가속화하고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취재차 만난 정희원 교수에게 문득 나의 노화 속도를 묻고 싶었다. 특별한 수면 장애는 없지만 마감 기간을 전후로 줄어드는 수면 시간, 주 2~3회의 음주, 디지털 미디어를 손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습관과 일주일에 많아봐야 2회 실시하는 필라테스, 단백질보다는 탄수화물을 선호하고 샐러드보다는 매콤한 양념을 즐기는 식단 등등. 이야기하면서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는 나 자신을 느꼈다. “수면 장애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기대 수명과 관련된 생활 습관 인자로 적정 체중, 신체 활동, 식사, 절주, 금연, 스트레스 관리, 수면이 있는데 그 가운데 수면이 부족하면 다른 인자도 악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대뇌, 특히 전두엽의 기능을 떨어뜨려 자제력이 약하게 만들고요.” 입 아픈 이야기지만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현명하고, 필라테스로 근력을 유지하는 것도 좋지만 젊을수록 유산소 운동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녹색 채소 등으로 식단을 구성하는 것이다. ‘고단백’에 열광하지만 단백질 결핍과 근육 손실을 겪는 60대 이상의 노인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성인에게는 고단백 음식 섭취는 열량 섭취만 더 늘리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우선 저속 노화 밥을 실천해봤는데 여러 잡곡을 섞으니 평소 좋아하지 않았던 렌틸콩의 식감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반찬이나 찌개보다 밥 자체의 고소한 맛을 음미하게 됐다고 할까? 식사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효과는 덤이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하나 떠올랐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상식인데,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노화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정희원 교수는 자신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은 만족감과 행복을 느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인 도파민을 더 좇게 돼 있어요. 어떤 행동을 하면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걸 의식하지 못해도 뇌는 알고 있습니다. ‘저번에 이런 행동을 했는데 기분이 좋더라’ 여기며 같은 행동을 다시 하게 만들죠. 음주나 당분 섭취는 수동적으로 도파민을 즉각 분비하는데, 이런 호르몬은 반대급부로 불쾌감과 스트레스까지 따라옵니다. 해소를 위한 자극적인 행동은 뇌와 몸에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그럼 또 도파민이 필요하게 되면서 더 자극적인 수단이 필요하죠.” 반대급부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 해소법은 독서와 산책, 명상처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만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 시스템을 서서히 구축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개 이런 의미 있는 스트레스 해소법은 ‘노잼’이긴 하죠.”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하버드 대학 데이비드 A. 싱클레어 교수가 <노화의 종말>에서 제시한 ‘항노화 영양제’도 저속 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그로 인해 떠오른 것이 세포 재생 능력을 담당하는 물질인 NAD+의 생성을 촉진하는 NMN 영양제다. 세포 에너지 대사와 DNA 복구에 도움을 주는 이 물질은 피부 노화 방지는 물론 심장이나 뇌 질환의 위험을 낮춰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영양제 소식을 접한 건 올 초. 적은 용량으로 시작해 6개월간 꾸준히 복용했지만 그나마 체감된 것은 피부 건조함이 줄었다는 정도다. 또 다른 항산화제로 알려진 글루타치온의 효과와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직 논문 등에서 발표되지 않은 영양제로, 수명과 관련된 유익한 효과를 증명하진 못했습니다. 항산화제의 타깃인 활성산소가 노화의 기전이기는 하나, 현대인은 운동 부족으로 건강한 활성산소조차 부족한 현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굳이 강력한 항산화제를 먹어서 득을 볼 가능성은 적죠.” 정희원 교수는 차라리 술이나 담배, 장시간 자외선 노출을 주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말을 보탠다.

한때를 즐기겠다는 ‘욜로(YOLO)’적 마인드가 책임지지 않는 미래에 젊은 층은 이제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것이 ‘저속 노화’와 그에 따른 ‘급속 사망’. 어린 나이부터 노쇠하지 않게 해 서서히, 건강하게 나이 들다가 질병을 앓는 일 없이 한순간에 눈을 감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수단은 실상 오래전부터 전문가들이 피력해온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결론은 잘 자고, 건강하게 먹고, 운동하는 데 꾸준한 일관성을 가지며, 스스로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줄 아는 것이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