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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 곧 삶이었던 부부가 리스본으로 떠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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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 곧 삶이었던 펠리페와 세베린 올리베이라 밥티스타 부부가 숨 고르기를 위해 택한 곳은 리스본이다. 빈티지와 아이코닉한 디자인, 동시대 사진 예술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저택에서 두 사람이 자기만의 시간에 집중하는 최고의 사치를 만끽한다.

펠리페 부부의 리스본 집에서는 도시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펠리페와 세베린 올리베이라 밥티스타 부부가 무심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응시한다. 세베린 곁에 걸려 있는 그림은 장 폴 구드가 그린 그레이스 존스의 초상화다.

펠리페 올리베이라 밥티스타(Felipe Oliveira Baptista)와 그의 아내 세베린(Séverine)이 패션계에서 쌓아온 커리어에 쉼표를 찍고 긴 휴식을 갖기로 한 후 당도한 곳은 리스본이었다. 분주한 파리를 벗어난 그들의 눈앞에 곧 끝없는 대서양이 펼쳐졌다. 부부는 2022년 아이들과 함께 언덕 위에 자리한 지금 집으로 이주했고,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이 저택과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펠리페가 회상했다. “처음 들어선 순간 오래된 이야기 속에 들어온 듯했어요. 우리 집이라는 확신도 들었죠. 이 집은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 지어진 아주 오래된 건축물입니다. 한때 도시 재건을 담당하던 건축가들의 본부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흔치 않던 넓은 발코니는 재건 현장을 내려다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죠. 이곳에서는 리스본 도심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요. 이처럼 오래된 집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경우도 드물죠. 안타깝게도 요즘엔 건물을 너무 쉽게 허물고 역사와 유산의 가치를 지나치게 소홀히 여기니까요.”

라프 시몬스가 크바드라트를 위해 디자인한 패브릭을 씌운 리네로제(Ligne Roset)의 ‘토고(Togo)’ 소파와 암체어가 놓인 거실. 미켈레 데 루키(Michele De Lucchi)의 멤피스 테이블이 가운데 놓여 있다. 정면에 보이는 그림은 장 폴 구드가 그린 그레이스 존스의 초상화. 천장의 펜던트 조명 ‘제피르(Zephyr)’는 마리오 보타(Mario Botta), 벽난로 위에 올려둔 검은색 세라믹 화병 세 개는 칼루 뒤뷔스(Kalou Dubus)의 작품이다.

세베린의 인테리어 감각은 이 집을 만나 더 깊어졌다. 그 전까지 집 꾸미기는 그녀에게 단순한 즐거움에 불과했다면 지난 3년간 휴식기를 보내며 그 일은 세베린의 공식 업무가 되었다. 빛이 화사하게 스며드는 복층 아파트의 묵직한 문과 천장은 세월의 깊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외의 공간은 세베린의 손길로 절제된 라인 위에 무성한 식물이 어우러지며 공중 정원이 연상되는 지금의 분위기에 이르렀다. 이곳은 또한 두 사람이 파리에서 지내던 시절의 추억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미셸 뒤카로이(Michel Ducaroy)의 ‘토고(Togo)’ 소파,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의 테이블, 거실 한쪽을 장식하는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의 초상화, 장 폴 구드(Jean-Paul Goude)가 직접 부부에게 건넨 선물과 다이닝 룸에 걸린 포르투갈 아티스트 엘레나 알메이다(Helena Almeida)의 사진 작품이 그 예다. “정말 많이도 찾아다녔어요. 괘종시계, 세마니에 서랍장(일주일을 뜻하는 프랑스어 ‘Semaine’에서 유래한 단어로, 서랍 7개를 갖춘 길고 좁은 형태의 서랍장을 말한다), 1980년대 디자인 가구까지, 이 집의 역사적인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는 현대적인 멋을 뽐내는 것들이죠. 우리가 만들어온 옷 역시 단순한 컨셉, 실루엣만 내세우지 않아요. 어떻게 입느냐까지 계획하죠. 인테리어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점에서요.” 세베린이 자신의 인테리어 철학을 밝혔다.

아줄레주 타일로 꾸민 주방 벽. 긴 선반 위에 정갈하게 놓인 푸른빛 오팔린 컬렉션이 눈에 띈다. 오른쪽 벽면에 살짝 보이는 사진은 볼프강 틸만스의 작품.
광택이 도는 식탁 위에 세자르(César)의 오브제 작품 ‘Pot à Lait’이 놓여 있고, 그 주변을 하빙크(Harvink)의 다이닝 체어 ‘지노(Zino)’가 둘러싸고 있다. 뒤로 보이는 나란히 놓인 의자는 필립 스탁(Philippe Starck)이 디자인한 것. 가운데 걸린 사진은 엘레나 알메이다의 작품이며 천장에 매달린 ‘트라이앵글(Triangle)’ 펜던트 조명은 마리오 보타가 만든 것이다.
다이닝 룸에 놓인 1970년대 괘종시계가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멋을 발산한다.

주방은 세베린이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해온 푸른빛 오팔린 시리즈와 폼발린 스타일(18세기 포르투갈 건축양식으로 내진 설계를 중시했다)의 벽이 조화를 이루며 리스본 특유의 감각을 자랑한다. 특히 서재 벽은 펠리페의 머릿속을 한눈에 보여주는 거대한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진행 중인 벽’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 구역은 방문 당시 선이 또렷한 드로잉과 각종 사진 스케치로 가득했다. 오래된 아틀리에에서 발견한 1960년대 건축가용 테이블은 펠리페가 특히 애정하는 아이템으로, 때로는 이 테이블을 세로로 세워 이젤처럼 사용한다.

펠리페의 사진과 에토레 소트사스가 디자인한 벽 조명이 나란히 걸린 거실. 안토니오 치테리오(Antonio Citterio)가 디자인한 가죽 암체어 한 쌍이 공간에 생기를 돋운다.

펠리페 부부에게 3년의 휴식은 창의성을 회복하는 시간이자 성찰의 기회, 서로의 다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였다. 두 사람은 도시에서나 런웨이에서나 언제나 한 팀으로 움직여왔으니 말이다. 펠리페가 패션계 전면에서 활약하는 동안, 세베린은 든든한 조력자로서 곁을 지켰다. 펠리페가 22년 전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한 후 라코스테를 거쳐 2021년 겐조를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펠리페가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같은 팀이지만, 이젠 역할이 바뀌었죠. 집에 한해서는 세베린이 컨셉과 분위기를 주도하고, 저는 의견을 보태며 색감 팔레트를 비롯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건네죠. 필요하면 맞춤 오브제를 디자인하면서요.”

미니멀한 감각으로 꾸민 방. 침대 위에 걸린 사진은 에바 스텐람(Eva Stenram)의 솜씨다.

지난 3년 동안 세베린은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오가며 인테리어에 몰두해왔다. 한편 사진과 회화 작업에 전념해온 펠리페는 최근 랭스의 도멘 포므리(Domaine Pommery)에서 전시를 열었다. “진정한 사치는 오직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에요. 이 꿈같은 휴식기만큼은 정말로 우리가 열정을 느끼는 일, 아주 창의적이지만 곁다리로만 해오던 일에 온전히 몰두해보자고 아내에게 제안했죠.” 그의 말처럼 패션계에서 가장 큰 사치는 바로 시간이다. 세베린과 펠리페는 6개월, 4개월, 아니 3개월마다 돌아오는 시즌 일정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 삶이 그야말로 기적 같다고 입을 모았다. 이제 그들은 패션 위크 캘린더에서 탈출해 철새처럼 온전히 사계절을 만끽한다.

방문 당시 패션계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펠리페 올리베이라 밥티스타의 작업실은 랭스의 도멘 포므리에서 예정된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1950년대 테이블 위에 나사(NASA)의 사진 자료와 레오 도르프네르(Léo Dorfner)의 ‘Gitane’,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의 ‘Across America’(1955) 등이 벽에 걸려 있다.

무엇보다 펠리페에게 이번 이사는 열일곱에 떠난 고향을 다시 마주하는 사건이었다. 세베린이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어느덧 리스본보다 파리에서 지낸 시간이 훨씬 길어졌죠. 하지만 결국 리스본에 닿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처럼 느껴져요.” 펠리페에게 리스본은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냄새, 빛, 친구, 가족··· 마법처럼 전부 다 그대로였다. 부부는 완전한 이방인도, 그렇다고 리스본 사람도 아닌 상태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에게 리스본은 잊고 있던 열정을 다시 일깨우는 동시에 에너지를 채워주는 도시다. 패션이란 한번 마음을 빼앗기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세계이기에 부부에게 이런 변화는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지난 9월 도멘 포므리에서 사진과 회화 작업을 선보였어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시절 틈틈이 모아온 개인 작업을 정리해 책 세 권으로 묶었죠. 저 자신과 삶을 다잡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재정비 시간이었습니다.”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됐다. 열정은 되살아났고, 아이디어는 더 뚜렷해졌다. 파리 패션계가 그런 그들을 손꼽아 기다린다. VL